아시아연대활동에서 ‘언어의 장벽’은 빈번히 지적되어 왔다. 시민운동단체의 회의석상에서 어떤 노장 활동가가 아시아연대를 하려면 아시아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활동가가 육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지만 연대와 언어에 관한 이러한 도전적 주장을 접할 때 활동가들의 가장 흔한 반응은 아마도 “영어도 못하는데...”라는 회의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영어부터 하고 아시아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잘못된 단계론에 입각해 있으며 아시아인들끼리 만나 영어로 소통할 때 나타나는 소외와 우스꽝스러움과 엘리트중심성에 대한 무의식에다가 모든 좋은 것은 영어권으로부터 온다는 사대주의적 경향까지 깔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반응이다. 최근 한국 사회운동에 새로운 키워드로 부상하는 ‘아시아연대’가 지정학적인 요인만으로도 한 때 유행으로 그치지 않을 장기슬로건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수행되는 활동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시아언어의 학습은 그다지 황당한 주장이 아니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언어는 단지 기술적인 수단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아시아언어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중국어와 일본어 이외의 아시아언어를 가르치는 곳은 일부 외국어대학교밖에 없다는 비관적 여건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국 이래 대한민국이 요즘처럼 아시아언어를 배우기 좋은 인구적 환경을 갖춘 적이 없었다는 낙관적 여건도 지적해야 한다. 약간만 노력한다면 외국인노동자나 국제결혼이주여성들로부터 일부 대학에서만 가르치는 아시아언어를 배울 수 있다. 활동가들과 단체회원들이 아시아언어를 이주민들로부터 배운다면 이주민들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자본이 증대하는 또 다른 좋은 효과가 잇따를 것이다. 적지 않은 사회운동단체에서 아시아의 활동가를 초청하는 인턴십이나 교육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들로부터 아시아의 언어를 배울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초빙된 외국인활동가가 우리사회에 무언가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될 것이다.

아시아언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능력자가 존재하는 중국어와 일본어 영역을 논외로 하고 관심을 갖고 배울 필요가 있는 중요한 언어로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추천한다. 동아시아의 4개국(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부르나이)에서 사용되는데다가 편리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전문가인 신윤환 교수는 동아시아지역협력의 발전도상에서 공용어가 선정될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말레이인도네시아어가 가장 강력한 후보언어임을 주장하며 말레이어의 위력과 미덕을 논리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동아시아공동체’라는 국가주도 지역통합체를 염두에 두고 제기한 주장이지만 사회운동의 아시아연대에 적용해도 될 만한 내용이므로 아래의 글을 읽도록 권하고자 한다. 공동체의 상상과 실질적인 형성에 있어서 언어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로>

-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공동체 정체성함양 워크숍” 발표문(2005년 1월 30일)

- 신윤환(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권고하는 바

1. 아세안+3 또는 동아시아 정상회담은 적절한 시기에 말레이인도네시아어(앞으로는 '말레이어'라 칭함)를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용어로 선포해야 한다.

2. 동아시아공동체가 실현될 때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로서, 아세안+3의 학술 공동체가 말레이어를 지역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촉진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

3.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특히 말레이어가 쓰이는 세 국가(싱가포르를 포함하면 네 국가)는 말레이어의 지역별, 지방별 차이점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표준적인 말레이어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4.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이 계획의 성공이 동북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동북아 사회에서 말레이어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영어는 왜 동아시아 공동체의 공식 언어가 될 수 없는가

5. 영어는 대부분의 동아시아인들에게 외국어로서, 동아시아의 문화를 표현할 수도 없고 동아시아의 통합성과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다. 만일 동아시아공동체가 영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채택하거나 그냥 그렇게 되도록 놔둔다면 그것은 자기 부정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어떠한 동아시아의 언어도 공식 언어로서의 역할을 영어보다는 더 낫게 수행할 수 있다. 그 언어는 적어도 일부분의 동아시아 문화를 담고 있을 것이며, 다른 동아시아 언어들에 연관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 영어는 말레이어를 포함하여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공식 언어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유일한' 공식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세안+3 또는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들은 단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될 수도 있다. 유럽연합의 사례와 같이, 동아시아공동체의 회원국 언어 모두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다언어 정책은 동아시아의 통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는 지니겠지만, 강한 동아시아 정체성과 응집력을 만들고 증진시키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어도 공식 언어의 후보에는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 언어가 실제로 쓰이려면, 말레이어와 영어만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7. 동아시아공동체의 건설은 시민사회와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기반을 쌓아야 한다. 단지 국가끼리 혹은 엘리트끼리의 공동체로는 부족하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지도자들의 의사 소통도 영어에 의존해서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계속 영어만을 공통 언佇?사용한다면, 평범한 동아시아 사람들끼리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현되더라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 것이다.

8. 동아시아의 문명과 서구의 문명, 특히 영미 문명은 거의 관련이 없기 때문에 동아시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은 무척이나 머리 아프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지금까지 이 절망적인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동아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과 에너지를 소비해 왔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

9. 영어는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배우기가 무척 힘든 언어이다. 문법은 복잡하고, 스펠링은 불규칙적이며, 용법은 천차만별이다. 이 언어는 프랑스어나 독일어, 스페인어 같은 다른 국제화된 유럽의 언어들과 비교하더라도 배우기가 훨씬 힘들다.

10. 국제어로서 영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스페란토와 같은 인위적인 언어들도 역시 우리의 고려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런 언어들도 서구적인 가치와 관념,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스페란토 단어의 70% 이상이 그 뿌리를 서구의 언어에 두고 있다.

11. 우리는 2004년 7월 6일-8일에 아프리카연합이 스와힐리어를 조직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기로 한 역사적인 결정을 지지하고 그 결정에서 배워야 한다. 스와힐리어 사용 인구의 숫자와 비율은 말레이어보다 더 적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말레이어의 장점

12. 오늘날 아시아에서 쓰이는 수천 가지의 언어와 수십 가지의 국어 중, 말레이어는 배우기 쉬우며, 어휘가 풍부하고, 화자들끼리의 평등함을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또한 말레이어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고, 동아시아 전체로 보아도 중국어 다음 가는 사용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13. 말레이어는 오늘날 세계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언어들 중에서('가장' 배우기 쉽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외국인이 배우기에 상당히 쉬운 편에 속한다. 몇 달만 학습하면 외국인도 말레이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 섞여 생활할 수 있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이 상대방과 대화할 때 그 상대방이 말레이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눈치 채면 곧바로 영어 사용을 중단하고 말레이어로 바꾸는 것을 많이 지켜보아 왔다.

14. 말레이어는 그 역사를 통해 모든 주요 문명으로부터 지식과 지혜, 미적 가치가 담긴 새로운 단어와 표현들을 풍부하게 받아들여 왔다. 현대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에는 인도어, 중국어, 아랍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영어에서 빌려온 단어들이 넘친다. 말레이어는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계속 적응해 나갈 것이다.

15. 말레이어는 평등한 언어이다. 자바어나 일본어, 한국어와 달리 말레이어에는 계급, 정치적 지위,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존댓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조도 남녀 가릴 것 없이 같다.

16. 영어나 다른 서구의 언어들과는 달리, 말레이어는 전쟁과 분쟁이 아닌 평화와 화합의 언어로, 제국주의와 착취가 아닌 교류와 협력의 언어로, 지배와 헤게모니가 아닌 다문화적인 공존의 언어로 발달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17. 말레이어가 아세안+3나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로 제안된다면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며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세안 내에서라면,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의 사용자가 워낙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제안에 다른 국가들이 찬성 입장을 표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아세안이 동북아시아를 끌어안으며 확장세를 보이고 있는 이 때, 말레이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중국에 대해 어느 정도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할 수 있다.

18. 동아시아 인구의 3분의 2가 사용하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표의 문자(한자)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어도 공식 언어로 고려될 만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면, 중국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것은 말레이어를 채택한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다. 중국어가 동아시아 공동체의 유일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장벽을 극복해야만 한다. 첫째는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의 지배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레이어와 중국어가 같이 공식 언어로 채택되더라도, 중국어에 비해 말레이어가 훨씬 배우기 쉽기 때문에 말레이어만이 실제 쓰이는 언어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문법과 용법, 말씨의 단순함

19. 말레이어는 문법이 단순하고 발음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으므로 배우기가 쉽다. 에스페란토는 일반적인 언어보다 "네 배"나 배우기가 쉽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말레이어는 에스페란토보다도 몇 배나 배우기가 쉽다.

20. 영어와 달리, 말레이어의 단어들은 스펠링대로 읽고 읽히는 대로 쓰면 된다.

21. 대륙부 동남아의 언어들(베트남어, 태국어 등)이나 중국어와는 달리, 말레이어에는 성조가 없다. 영어와 달리 음절에 대한 강세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

22. 대부분의 다른 언어들과는 달리, 말레이어의 동사에는 시제나 주격에 따른 어미의 변화가 없다. 자동사와 타동사의 변화는 있지만 간단하고 규칙적이다.

23. 말레이어의 명사는 복수로 변할 때 불규칙 형태를 띠지 않는다. 어느 명사나 복수로 만들고 싶으면 그 명사를 두 번 연속 말하면 된다. 그렇게 동사와 형용사, 부사를 복수형으로 만드는 것은 원래의 단어에 시적이고 다채로우며 때로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하는 의미를 더해 준다.

24. 말레이어의 어순은 고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유동적인 편이다. 주어와 술어의 위치가 바뀌어도 되고 구(phrase)는 어느 자리에나 들어갈 수 있다. 보통 문장의 앞부분에 중요한 단어나 구가 온다. 그러나 형식적인 문어체에는 엄격한 규칙과 문법이 있어 의사소통이 혼란될 염려가 없다.

25. 구어에서는 완전한 문장을 갖추어 말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문 편이다.

말레이어의 역사와 언어 지도

26. 말레이어는 한 지역의 언어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근세로부터 동남아 전역에서 모여든 무역상들의 의사소통에 쓰였다. Anthony Reid에 의하면, "마젤란의 수마트라인 노예가 1521년 중부 필리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필리핀 사람들이 곧바로 그 말을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고, 또한 거의 200년 후에, 민다나오에서 말레이어를 배운 Dampier의 영국인들이 그것을 베트남 최남부에 있는 Puolo Condore에서 써먹었을 수도 있다."*

27. 신생국의 공식 언어로서의 말레이어의 경쟁력은 말레이어의 한 부류가 국어로 인가된 아세안의 네 국가, 즉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어를 사용 언어로 인정한 동티모르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동티모르에서는 인구의 소수만이 말레이어를 모어로 사용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바어, 싱가포르에서는 중국어, 동티모르에서는 테툼어가 더 널리 쓰인다.

28. 인도네시아의 성공 사례는 특히 본받을 만하다. 인도네시아가 독립 이후 말레이어를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로 채택한 이후 6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몇 백만에서 2억 이상으로 늘었다. 그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말레이어는 리아우(Riau) 지역과 해안가에 뿌리를 둔 소수 언어에 불과했다. 단지 정부의 정책만으로 '바하사 인도네시아'는 급속히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었다. 쉬운 언어라는 타고난 장점이 이만큼의 성공을 이끌어 낸 중요한 요인이었다. 비교해 볼 때, 필리핀에서의 영어나, 그보다는 낫지만 싱가포르에서의 영어가 인도네시아에서의 '바하사 인도네시아'만큼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29. 2차대전이 막 끝났을 무렵,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다 합쳐 봤자 천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3억 명이 사용하고 있다. 말레이어는 2차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빨리 퍼진 언어 중 하나이다. 지금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중국어, 영어, 힌디/우르두어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다.

30.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도 말레이어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몇몇 소수민족들이 있다. 몬-크메르어와 베트남어도 말레이어가 속한 오스트로네시안 언어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 체계는 동남아 국가들에서 짧은 시간 내에 말레이어를 대중적인 외국어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1. 만 명이 넘는 중국계 인구가 말레이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뿌리박고 살거나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Chinese Malay" 혹은 "Baba Malay"라 불리는 그들끼리의 말레이어를 발전시켜 왔다. 지금은 일본인, 한국인 체류자들도 만 명이 넘는다. 이러한 동아시아인들은 말레이어를 동북아에 옮기고 퍼뜨리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2.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는 많은 수의 아랍인과 인도인의 자손, 이민자들, 사업가들이 자주 방문하거나 거주하고 있다. 이 두 나라의 무슬림 인구는 서아시아(중동)보다 더 많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문화는 인도, 아랍 세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접촉과 전통은 말레이어가 동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진정한 아시아의 언어로서 아시아 전체에 퍼져 나가고, 미래에는 지구촌의 언어로 발돋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망

33. 하나 이상의 동아시아 공용어를 갖는 것은 강한 동아시아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증진하며, 언젠가는 동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34.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인정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통합에 놓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이를 좁히고 메우는 데 기여할 것이다.

* 번역: 서지원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과정)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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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6일 대우인터내셔널 버마에 불법무기 수출혐의 적발'

'2006년 12월 15일 반기문 신임 UN총장 취임 선서'


불과 열흘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일어난 이 두 가지 일이 현재 국제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한국이 가지고 있는 두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류전체의 평화와 안녕을 담당하는 UN의 최고위직에 당당하게 한국의 반기문 전 장관이 당선되고 이를 축하하는 각계의 목소리가 높은 와중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우인터내셔널은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군사독재 국가이며 동시에 인권탄압 국가인 버마에 불법으로 포탄 제조공장과 설비, 기술까지 수출을 하다가 적발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이미 버마 가스전 개발 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인권유린 문제로 인해 국내외의 비난을 사고 있다. 이 아이러니한 두 상황을 보면서 한국의 국제사회에 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원뜻에 대해서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의미로는 대강 높은 사회적 신분과 부를 지닌 사람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정도로 쓰이고 있다. UN헌장이 언급하고 있듯이 평화, 인권 그리고 자유의 수호자인 UN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것에만 기뻐할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그에 걸맞은 국제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하고 있는지 먼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혹자는 일개 사기업이 그깟 무기 좀 다른 나라에 팔았다고 해서 한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라는 문제까지 확대해석할 일이 뭐가 있냐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기업이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데, 또 대우라는 기업이 직접 인권탄압에 개입한 것도 아닌데, 무슨 큰 잘못이 있는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포탄제조는 버마라는 나라의 국방력 향상을 위한 것이지, 그 포탄이 국민들을 탄압하는데 쓰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반론들은 현재 버마의 상황과 버마의 인권, 민주화를 위해서 국제사회가 기울이고 있는 노력에 대해서 무지한 탓에 나오는 말들이다.

현재 버마의 군사정부는 1990년 민주적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권력을 찬탈한 소수의 군 고위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한해에 몇 십만 명이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있으며, 강제이주가 수시로 자행되고 있다. 5만여 명에 달하는 18세 미만의 소년병이 강제징집당해 복무하고 있고, 공공보건 수준은 세계최악으로 5세 이하 사망률은 상황이 열악하다는 북한의 두 배에 달한다. 한해에 1주에서만 해도 수백 건의 군인에 의한 강간사건이 보고되고 있으며, 인신매매도 광범위하게 행해진다. 군사정부에 저항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도 빠지지 않는다. 이 모든 인권유린이 군사정부의 직접 개입 또는 묵인 하에, 군 고위층의 이익을 위해서 자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기업의 버마 투자에 따른 과실은 오직 버마 군 고위층에게만 돌아가고, 버마 민중에게 돌아가는 것은 외국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사회간접자본 건설 현장의 강제노역, 강제이주뿐이다. 버마에서 가스전 개발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이 버마인들의 복지와 버마의 개발을 위해 쓰일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위험하다. 여기서 얻어지는 이익은 군사정부의 권력자 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버마에 대우가 포탄공장을 짓고 기술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버마 군부 고위층은 상당한 뇌물을 챙겼을 것이다. 반면에 포탄을 생산하는 공장은 일인당 국민소득 172달러인 버마인들의 삶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사업들에서 대우를 비롯한 외국기업이 얻는 막대한 이익들은 고스란히 외국기업의 몫이다. 가스전 개발사업의 이익, 포탄공장 건설과 기술의 밀수출에 관련되어 버마 군부가 받는 뇌물, 그리고 이런 사업들에서 얻어지는 대우를 포함한 외국기업의 이익들은 모두 버마 사람들의 피와 고통을 먹고 자란 독버섯이다.

버마의 인권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국제사회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버마 군사정부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정부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사실상 버마와 경제관계를 끊었다. 또 유럽연합 차원에서 버마에 대한 공동입장을 정리하고 이를 회원국들이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도 GSP(일반특혜관세제도) 공여를 중단하고, 버마에 투자를 금지하는 등의 경제제재를 비롯하여 버마 군부인사의 미국입국을 불허하는 조치도 취하고 있다. 태국과 호주도 버마와의 관계를 재검토하고 투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뿐만 아니라 각국의 노동조합도 자국정부에 버마와 관계를 재고할 것을 촉구하고 있으며, UN, ILO(국제노동기구),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 등 많은 국제기구들이 버마 상황에 대한 다각도의 조사를 벌이고 인권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권고안, 결의안을 채택하여 버마 군사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이런 개별국가, 시민사회, 국제기구의 노력에 한국, 특히 정부의 공식적인 참여와 적극적 활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국제사회에서 '노블리스'를 추구하고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그에 따르는 '오블리제'는 등한시하고 있는 한국의 슬픈 현실이다.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엄청난 공적자금이 투여된 대우라는 기업이 버마의 끔찍한 군사독재 정부와 밀착하여 버마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으며 돈을 버는 이런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하거나 방관해서는 안된다. 차제에 정부는 버마에 투자한 한국기업들에 대한 모니터링을 더욱 철저히 해야 하며 나아가 눈앞의 경제적 이익에만 매몰되지 말고 적극적 인권외교라는 방향의 정책적 선회가 필요하다. 그것만이 한국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에 맞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인도적 차원에서도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다.
이재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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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7월 새로 이전, 개장한 인천시립박물관에 ‘김보섭의 화교 이야기’라는 사진전이 열렸다. 사실 여기에 전시된 사진들은 김보섭의 새 작품들은 아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주최하는 국제 심포지엄 ‘화교, 세계화의 주역’(2006.10.20)을 위해 지난 1995년에 전시했던 사진들을 다시 모아 전시한 것이다. 글로벌 시장경제 속에 중국이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오랫 동안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할까 더 솔직하게는 다소 천시되기까지 해 왔던 화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화교경제권, 화교네트워크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화교가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한국에서, 동북아의 허브라는 경제적 목표 하에, 각 지역 지자체들이 화교경제 유치에 혈안이 되고 있다. 그런 맥락 속에서, 인천뿐 아니라 부산, 목포, 대구에서까지, 화교는 지역문화의 콘셉트로 새삼스레 ‘발견’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시 불려나온 십여 년 전의 사진들을 둘러보면서, 마음 한 켠에 어딘가 씁쓸했다. 10년 전 작품전시회 도록 『청관(淸館)』발문에 쓰여 있듯이, 그의 사진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오마쥬’이지,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다는 화상네트워크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금간 시멘트 벽, 녹슬은 함석 지붕, 오래된 미닫이 문, 때묻은 부엌……. 그 빛바랜 동네, 주름 패인 노인들의 얼굴은 시간의 풍화를 묵묵히 버텨 온 그들의 가난한 삶의 역정을 소리없이 전해준다. 한 때 제물포항의 대외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이 청국 거상(巨商)의 후손들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의 패배라는 시련을 거치면서, 중화제국의 몰락과 함께 쇠잔해 갔다. 사진 속 회색 동네, 한 때 번영과 활력으로 들썩였던 청관 거리는 간데없고, 그들의 고된 삶의 흔적만 덩그마니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런 몰락한 청상(淸商)의 이야기가 그의 작품전의 전부는 아니다. 사진전의 매력은 그것을 바라보는 한국인 작가 김보섭의 시선에 있었다. 이국 땅에서 평범하고 고요하게 진행되는 그들의 일상 속에서 작가가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작가는 인천 화교들의 고향인 산동성까지 찾아가 그들의 삶의 뿌리를 담고 싶어했다. 한국의 이국인이자 유일한 소수민족인 화교를 다룬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들의 주름진 삶 구석구석에 ‘우리’가 묻어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고되고 해맑은 삶의 자국은 우리의 삶 속에 패인 주름이다. 낯선 복장과 생활 소품들을 한 이국인의 표정은 어느 틈엔가 친숙하고 편안한 이웃이 되어 인천인의 생활세계로 귀환한다. 그들은 우리가 겪었던 세월을 함께 겪어왔던 것이다. 식민이라는 시련의 세월을 그들도 같은 땅에서 우리와 함께 거쳤고, 전쟁, 분단, 냉전의 어두운 터널을 우리와 같게 혹은 다르게 공유해 왔다. 시간에 풍화되어 화석화되어가는 옛 청관에 대해 작가가 갖는 애잔한 심경은 그저 타인에 대한 동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요사이 차이나타운을 살리자는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지역 내 화교 주민들에게 여러 모로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들이 혹 지역 내 화교를 대상화하고 소외시키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최근 지역문화론이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도구로 동원되면서, 지역 내에 살아있는 문화적 숨결들을 오히려 덮어버리지는 아닐지. 당연히 차이나타운을 살리기 위해서는 화교 상권을 살려야 하고 그런 면에서 경제논리를 떠날 수 없다. 다만 거기에 결락되어선 안 되는 것은, 차이나타운은 화교가 이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기 위한 정신의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석화되어가는 청관의 역사를 복원하고 그것이 지역 내 생활 속에서 자유롭고 발랄하게 숨쉴 수 있게 해야 한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문화혼종성(hybridity)은 사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차이나타운은 인공도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화교의 삶의 이야기를 복원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과 하나로 뒤얽혀 흘러 온 여정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흔적을 기억하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정체성(identity)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백지운(인천문화재단, 연세대 중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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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생활하며 공부하는 건 아주 멋진 경험이다. 고향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책이나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지식을 얻게 해준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생활 양식을 직접 배우며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한 번 시작하면 쉽게 그칠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2년간의 유학을 계획하며 한국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어려운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에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 하면 아마도 문화 충격일 것이다. 1958년 인류학자 칼베로 오베르그에 의해 최초로 정의된 '문화 충격'이란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 처한 인간이 느끼는 장기간의 심리적 스트레스를 뜻한다. 예를 들어 내가 경험한 문화 충격은 한국에서 친구를 사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친구가 되는 과정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렵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친구 관계가 고등학교 또는 그 전의 학교 동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 예외는 대학 신입생 때라고 할 수 있다. 아는 친구 한 명이 대학에서 1학년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미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여학생이 수업을 듣는 이유가 궁금했다고 한다.

"재미없지 않아?"

"친구 사귀려고 있는 거예요."

공부를 하기 위해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는 이런 류의 태도는 대학 신입생들 사이에서 매우 보편적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쉽게 친구를 사귄다. 스스로를 직접 소개하며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소개로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같은 반 또는 같은 모임에 속해 있다는 상황에 의해 사람을 사귀는 게 일상적이다.

이러한 점은 한국인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보이는 어색한 모습에서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생전 처음 만난 한국인이 나에게 불쑥 "어느 나라에서 왔어?"라고 묻는 경우는 셀 수조차도 없다.

하지만 "안녕", "어떻게 지내"라고 묻는다거나 "버스가 언제 올까", " 요즘 날씨가 좀 이상하다 그렇지?" 와 같은 말을 건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왔다고 대답을 하면 그 뒤 연결되는 질문이 없거나 대화를 계속하려는 노력도 없이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갑작스럽게 끝나고 만다.

물론 한국인 친구를 사귀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친구 사귀기가 많이 힘들고 친구의 친구라던가 선생님이었다던가 하는 인맥을 통해야 수월해진다는 거다. 이 같은 차이의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하지만 이것은 사회학 박사 논문의 주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로선 그 차이를 인정할 뿐이다.

* 유완또(Yuwanto)는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의 주도 스마랑(Semarang)에 있는 디뽀네고로(Diponegoro) 국립대 정치학과 교수다. 한국정치로 논문을 쓰기 위해 서강대 국제대학원에 유학한 지 4년 되었으며, KBS 국제방송국에서 자신의 한국체험을 인도네시아어로 방송하는 일도 하고 있다.
유완또(인도네시아 교수, 한국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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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지난 칼럼처럼 이번에도 TV이야기로 시작을 할까 한다. 바보상자인 TV가 필자에게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니 기특한 일이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노예할아버지”, “노예청년” 등의 내용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방송 후 누리꾼들이 “노예할아버지”, “노예청년”, 그리고 유사하게 “노예어린이집” 등에 관한 이야기와 동영상을 여기저기에 퍼 날랐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학대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꼈고, 이들의 “인권”이 이처럼 유린되도록 방치한 행정당국에 대한 질타도 이어졌다. 무엇이 누리꾼들을 이렇게 바쁘게 만드는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최소한 지켜져야 할 인간 존엄성과 인권이 유린되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다. 흔히 하는 말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데, 경제적 능력의 차이, 학력의 차이, 연령의 차이, 성별의 차이, 지역의 차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데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제 국가인권위원회도 생기고, 사회적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고조되면서 나 자신에 대한 인권 침해나 국내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난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고조되는 인권에 대한 관심이 우리나라에서는 국경과 국적이라는 울타리를 넘기는 아직 힘겨운 모양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국내에도 국경을 넘는 인권문제, 외국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걱정하고 행동하는 시민단체들이 다수 있고, 이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개인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산의 범위는 아직 그리 넓지 않은 것 같다.

국내에서 또는 “우리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인권유린과 차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생각으로 떨쳐 일어나 비난을 하면서도 국내에 있는 많은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 그리고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버리거나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 자신부터 생각해 볼 문제다. 다양한 핑계로 인권외교에 미온적인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개인적 차원의 인권에 대한 관심도 국경을 넘는 순간, 국적이 달라지는 순간 한없이 약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생면부지의 노예할아버지, 나와 사돈에 팔촌에 구촌에 무촌(?)도 아닐 것 같은 노예청년의 인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이 한국인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권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 가지는 최소한의, 당연한 권리다. 그리고 인간은 어디에 살건 모두 같은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명칭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 인권에도 국경과 국적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 대한민국이라는 민족국가, 한국인이라는 국적에 매어 있을 단 하나의 이유도 필자는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국경과 국적으로부터 해방시키자. 우리의 해방된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전 세계 도처에서 지금 이 시각에도 자행되고 있는 더 큰 규모의, 더 악랄한 인권유린에 눈을 뜰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버마(미얀마)에는 300만명에 달하는 난민이 고통받고 있고, 7만명의 소년병이 가혹한 훈련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군에 의한 강제노동과 성매매, 성범죄(성범죄 피해자의 30%는 바로 살해된다고 한다)가 일상적으로 자행된다. 그리고 지구상에 버마처럼 “인간”이 고통당하고 있고, 인권이 유린되는 나라는 얼마든지 있다. 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국경과 국적에 갇힌 우리의 인권에 대한 관심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하겠다.

이재현(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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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명절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아시아 외국인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고 올 추석도 거르지 않았다. 10년 전만해도 우리는 아시아로부터 온 외국인들이 왠지 거북하여 거리를 두거나 서먹서먹해 했지만 지금은 서로 상당히 가까와진 느낌이 든다. 이렇게 우리는 아시아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과정에 있다.

1990년에 2만 명이 못되던 우리나라 외국인노동자가 2004년 말에 42만 명을 넘어섰다. 출신국가별로 보면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몽골,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스리랑카 순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사람들이다. 한편 국제결혼은 1993년 전체 혼인신고의 1.6%에 불과했지만 2005년에는 13.6%로 늘어났다. 농어촌지역 혼인은 국제결혼인 경우가 35.7%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아시아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여성의 한국러시와 그에 대한 한국사회의 책임의식은 백여 개에 달하는 외국인노동자 및 이주민인권운동단체들을 출현시켰다. 처음에 우리는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다양한 아시아인들과 공존할 수 있게끔 우리 사회가 다문화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문화다양성이 곧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이라는 논리까지 제기되고 있다. 아시아 이주자들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참 멋있는 발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생각을 실천할 수 있을까? 생각만 전환적으로 한다고 될 일은 아닌 듯하다. 우리를 다문화적으로 만드는 기획은 명절 때마다 아시아인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한과를 먹고 한국예절을 배우는 자리를 만드는 것으로는 달성되기 어렵다. 물론 한국을 알게 하는 일은 이들에게 즐거운 일이자 꼭 필요한 일이므로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위상을 교육과 실천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재조정하는 기획 또한 즐겁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겠지만 일부 단체들이 이미 선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외국인노동자센터는 외국인노동자와 한국인이 함께 아시아문화를 학습하는 소모임을 결성하였는데, 외국인노동자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 언어, 예절, 종교를 다른 나라 출신의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외국인노동자단체에서는 아시아 소식을 아시아 각국의 언어로 게시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었는데 그 사이트의 내용을 채우는 이들이 바로 외국인노동자들이다. 외국인노동자로 구성된 밴드가 외국인노동자의 고통과 희망, 연대의 필요성을 노래하여 우리 민중문화운동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의 기획과 실천이다.

우리를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로 이끌고 그 속에 담긴 풍요로운 지혜로 인도하는 교사가 바로 이주노동자들과 결혼이주여성들인 것이다. 이러한 발상을 실현하려면 우리의 아시아 친구들을 수동적 수혜대상에서 능동적 기획주체로 인식하고 역할을 부여하는 기획, '그들을 위한 자리'인 동시에 '우리를 위한 자리'여서 '함께 하는 자리'로 만드는 기획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열린전북]에 실린 글입니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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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9일 태국에서 일어난 쿠테타는 안정 궤도에 들어섰다고 평가되던 태국 민주주의 파국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현재 태국에서 ‘좋은 쿠테타’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국은 1992년 민주화 이전까지 17번의 쿠테타가 있을 정도로 ‘쿠테타의 나라’로 불리웠다. 많은 사람들은 쿠데타로부터 쿠데타로 이어지는 ‘태국식 민주주의’의 악순환이 1992년 민주항쟁으로 군사정권이 무너지면서 종결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1997년 경제위기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따라 긴축정책을 폈다. 그 결과 기업파산과 실업자가 급증하였다. 이 와중에 일각에서 외세의 간섭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영리하게 읽어내고 ‘타이사랑당’이라는 이름으로 지지층을 조직화낸 정치가가 다름 아닌 억만장자 탁신이다. 타이사랑당은 강력한 정당의 출현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1997년 신헌법하에서 처음 치루어진 2001년 선거에서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탁신은 유례없이 막강한 정치적 지지를 등에 업은 민간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탁신은 절대적 지지 속에서 독재자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론통제, 강경진압으로 일관한 ‘마약과의 전쟁’, 남부 무슬림지역에 대한 홀대와 무슬림 민간인 학살 등은 현지 남부 무슬림인들은 물론이고 비판적 지식인층과 시민사회의 분노를 샀다. 태국 사회에서 지존의 존재인 국왕도 탁신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에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탁신의 독선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그런데 올해 1월 탁신 일가가 19억달러에 이르는 자신들의 주식을 해외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반애국적’ 행각이 발각되었다. 이에 방콕 시민이 분노하고 연일 거리로 나왔다. 탁신은 수상직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이후 이를 번복하는 태도를 보였다. 오는 11월에 재선거가 예정되었으나 탁신의 농촌진흥정책의 수혜자라고 여기는 대다수의 농촌지역은 여전히 탁신의 표밭이었다. 야권은 난국해결을 위해 국왕이 새로운 수상을 임명해줄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와중에 국왕에 대한 충성과 탁신의 비리 척결을 명분으로 한 군부 쿠테타가 일어났다.

한마디로 이번 쿠테타는 금권민주주의의 독단적 행태, 부정부패가 불러온 반민주적 정변이다. 15년전에도 군부는 민선정부의 부정부패를 이유로 쿠테타를 일으킨 바 있다. 쿠테타 초기 국민들은 쿠테타를 일으킨 군부에 대해 지금처럼 큰 반감이 없었다. 그러나 군부가 더 이상 정치개입을 않겠다는 애초의 약속을 어기자 엄청난 규모의 반군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이번에도 쿠테타를 주도한 세력은 쿠테타 직후 조기 민정이양을 약속했다. 역사가 또다시 반복될 것인지, 향후 태국군부의 행태와 시민사회의 대응이 주목된다.



* 이 글은 <대학주보>에 실린 글입니다.
박은홍(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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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리핀에서는 아로요 정부가 집권한 2001년부터 일반 시민, 인권활동가들뿐 아니라 진보진영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에 대한 살인과 실종이 증가하고 있어, 희생자 수가 750 여명이 넘어섰다. 2006년 한해만 해도 약 75명이 살해당했고 약 25명이 실종되었다. 주로 마스크를 하고 검은색 옷을 입고 군화를 신은 신원미상의 사람이 오토바이를 탄 채 총을 쏴 죽이는 식이다. 하지만 철저히 조사하여 진상규명을 하고 가해자를 처벌해야 할 필리핀 정부는 아직 조사에 착수하지도 않고 있으며 가해자에 대해서도 처벌하지 않은 관행이 만연되어 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농민, 노동자, 변호사, 인권활동가, 성직자, 기자들을 포함한 일반 민중들이며, 아로요 정권은 이들의 사망이 자신들과 무관하다 주장하나, 이들이 살해 전 군대와 경찰로부터 협박을 받았고 이들의 죽음이 아로요 정권이 부시의 대 테러전쟁에 편승하여 시작되었음을 비추어 볼 때, 필리핀 정부가 이러한 암살에 깊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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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9월 21일 오전 11시 필리핀 대사관 앞에서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와 한국 내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은 필리핀에서 계속되는 활동가 살해를 규탄하는 항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날 아침에도 필리핀에선 한 명의 활동가가 또 살해되었다고 한다. 기자회견을 마친 후 필리핀 대사를 만나 인권탄압 중단과 진상 조사 규명,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였다. 이 같은 항의 행동은 15 나라에서도 21일을 공동행동의 날로 정하여 함께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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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9월 25일(월)~9월 29일(금)까지 오후 3시~5시 인사동 입구에서 필리핀에서 살해당한 희생자들의 사진전, 필리핀 정부에 보내는 항의서명 운동, 후원금 모금을 벌이는 거리 캠페인도 진행할 계획이다.

<성명서> 필리핀에서 지속되는 활동가 살해를 규탄한다!

34년 전 오늘은 필리핀에서는 수 만명의 생명과 자유를 앗아가는데 시발점이 된 계엄령이 선포된 날이다. 필리핀 민중들의 힘으로 계엄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지만, 아로요 대통령의 집권 5년 동안 필리핀에서는 무고한 생명 751명이 살해를 당했고, 184명이 실종되었다.

불행히도, 이는 인권탄압으로 악명높았던 마르코스 집권 14년간 발생률에 버금가는 것으로, 그 피해자는 진보진영에서 활동하는 농민, 노동자, 인권활동가, 변호사, 성직자, 기자들과 일반 민중들이다.

문제는, 이런 불행한 사건들이, 필리핀 아로요 정부가 미국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과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서 체계적이고도 조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리핀 아로요 정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호응하며 일명 '자유 수호 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미국과 합동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아로요 정부는, 1992년 일명 ‘국가보안법(anti-subversion act)'을 개정한 뒤 평화 협상을 진행해 오던 필리핀 공산당 등 공산주의 계열 단체들을 2005년 6월 불법 단체로 공공연히 규정하고 이들을 완전 궤멸하겠다고 선포하며 전면전에 나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단체들도, 활동의 목표와 방식 여하를 떠나, 공산주의 계열 단체로 분류한 뒤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살인과 강제실종 등 각종 인권탄압을 가하고 있다.

특히, 아로요 정부가 부정선거, 부정부패,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 등으로 최대 집권 위기를 맞고 있는 올해 1월부터 5월까지만 해도 75명의 살인사건과 25명의 강제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필리핀 정부는, 살인과 강제실종 사건이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살인 또는 강제 실종 사건의 피해자들 대다수가 진보진영과 좌파진영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고, 일부 사건에서는 사건 발생 전 군부나 경찰들이 피해자를 협박한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더구나, 필리핀 정부는 살인 또는 강제실종사건을 수사하거나 가해자들을 처벌할 의지가 없으며 이러한 불처벌의 만연은 오히려 더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따라서, 필리핀 민중들과 국제인권단체들은 필리핀 아로요 정부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활동가들에 대한 폭력적 탄압과 물리적 공격은 그 자체가 불법일 뿐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인권과 생존권을 침해하는 매우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2005. 10. 20 필리핀 네슬레 노조위원장 포르투나의 살해 사건에 대해서도 필리핀 정부에게 진상 규명과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조사를 해태하고 가해자들에게 사실상의 면책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이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활동가들에 대한 지속적인 살해 및 실종을 부추기고 있다.

오늘도, 목숨을 걸며 피 냄새 나는 일상을 살아야 하는 필리핀 활동가들에게 뜨거운 연대를 표하며, 필리핀 정부에게 아래와 같은 사항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하나. 필리핀 정부는 인권활동가, 노동운동가, 재야 정치인 등에 대한 살인과 납치 등 인권탄압을 중단하라.

하나. 필리핀 정부는 살인과 납치 등 인권탄압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하나. 필리핀 정부는 국가안보라는 정책 하에 추진하고 있는 운동단체와 정치 조직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고, 인권, 노동, 농민, 정치 운동을 보장하라.

하나. 필리핀 정부는 필리핀 공산당 등 공산주의 계열 단체들과 체결한 평화 협정의 이행을 위하여 평화 협상에 나서라.


2006년 9월 21일


경계를 넘어/ 광주인권운동센터/ 나와우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연대위원회/ 부산인권센터/ 불교인권위원회/ 아시아의 친구들/ 아시아 태평양 노동자연대/ 오산 이주노동자 센터/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한국노동네트워크 협의회/ 한국전쟁후민간인학살진강규명범국민위원회/ 카사마코(재한 필리핀 이주노동자 연대)


< 배경설명>

현재 필리핀에서는 인권활동가와 정치인, 시민단체활동가, 노동자, 농민, 법률가, 언론인, 교사, 학생,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살해가 계속되고 있다. 필리핀의 한 인권단체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06년 현재까지 사망자 수는 700명 이상에 이른다고 한다. 심지어 실종자와 사망자를 합쳐 1천명에 다다른다는 보고도 있었으며 올해 들어 이미 100명이 넘는 수가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이러한 실종과 살해는 필리핀 내의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부 따갈로그, 비꼴, 민다나오, 동부 비사야 등 필리핀 전역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오토바이를 타고 복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람들의 총격으로 사망하였으며 이 외에도 고문, 약식 처형 등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희생자 중에는 최소 43명의 어린이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중 2명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였다.

살해 방식과 희생자들의 유형이 거의 동일한 점을 들어 필리핀 인권단체를 비롯한 국제인권단체들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가해자로 정부의 허가와 지원을 받는 민병대와 필리핀 군대를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범인을 찾아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리핀 정부와 정부군이 이러한 사건에 직접 연루 혹은 묵인, 동의, 공모 하고 있다는 증거가 속속 보고되고 있지만 필리핀 정부는 정부의 관련 의혹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살인이 좌파진영 내부의 당파경쟁 혹은 내부 숙청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계속되는 살인에 대한 국제 사회와 필리핀 국내의 압력으로 필리핀 정부는 8월 21일 미디어 종사자 및 활동가들에 대한 살인을 조사하는 독립적인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위원회가 설치된 이후에도 가해자들에 대해 조사할 의도가 없음을 밝히고 있으며 친정부 인사가 포함된 위원회가 과연 독립적인 조사를 진행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아직 예산조차 지원되지 않고 있다. 하루에 사람이 한 명씩 죽어나가는 상황임에도 정부가 사건 조사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않는 것은 필리핀 정부가 정치적 살인을 사실상 허가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것은 6년 동안 지속된 일정한 패턴의 정치적 살해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2006년에 들어 확연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6년 2월 아로요 대통령은 주요 야당의 구성원과 우익, 공산주의자, 진보적인 좌파 그룹과 전ㆍ현직 군 인사들이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대통령은 군대에 '모든 불법적인 형태의 폭력을 철저히 진압하라'고 명령하였으며 6월에는 대규모 반란진압작전을 위해 군대에 추가 예산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필리핀 정부의 반란진압작전은 미국의 대테러전쟁과 맥락을 같이 하며 아로요 정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는 공산당 반군세력과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필리핀 전 지역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최근 미국은 필리핀 정부에 군사 지원을 늘리며 남부 술루제도에서 필리핀 정부군과 대테러 합동 군사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필리핀 정부군과 경찰은 많은 좌파 조직들이 필리핀 공산당의 무장 조직과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좌파 조직들과 필리핀 공산당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서 진행되고 있는 아로요 정부의 반란진압작전은 반란진압을 명분으로 한 무차별적인 폭력을 허락함으로써 오늘도 수많은 필리핀 활동가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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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운동권에 ‘아시아연대’가 새로운 키워드로 부각되고 있다. 그 아시아연대의 중심대상지는 ‘동아시아’(동북아+동남아)이다. 서남포럼의 추산에 따르면, 동아시아연대를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는 시민사회단체는 100개에 육박한다. 참여연대는 2004년 창립 10주년을 맞아 아시아연대활동의 활성화를 주요사업으로 상정했으며, 올해부터는 국제연대위원회의 아시아연대사업을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인권재단도 아시아연대를 주요 역점사업으로 삼고 동남아 인권문제에 대한 조사와 활동가교류프로그램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밖에 ‘함께하는 시민행동’ ‘버마행동’ ‘국제민주연대’ 등 20여개 단체가 버마(미얀마)의 인권침해를 규탄하고 관심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으며, ‘바스피아’도 아시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보호를 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인권운동단체뿐만 아니라 노동운동계의 아시아연대도 활발하다. 대표적으로 ‘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 한국위원회’는 아시아레이버넷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아시아의 노동정보와 동영상을 영어나 아시아 언어로 게시하는가 하면 한국과 동남아의 단위노조간 자매결연을 통한 풀뿌리연대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그 밖에 환경운동, 여성운동, 소수자운동, 평화운동, 문화운동, 학술운동 등의 분야에서도 많은 단체들이 동아시아연대활동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홍콩,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 각지의 초국적 단체들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활동가들도 한국의 동아시아연대운동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이러한 동아시아연대운동은 동아시아를 담론의 대상에서 실천의 영역으로 구체화하는 작용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리랑’의 김산처럼 한국 독립을 위해 중국혁명에 뛰어든 실천방식이나 안중근처럼 동양인의 정체성에 입각해 일본의 침략을 질타했던 논리에서 간파되듯이, 한국 사회 동아시아연대운동의 기원은 해방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해방이후 한국전쟁과 냉전으로 동아시아의 지역적 연대 구상과 실천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다. 아마도 한국사회의 동아시아연대 이니셔티브는 90년대 이후의 산물일 것이다. 90년대 이후는 한국인 자본의 동아시아 투자와 동아시아인의 한국 유입이 두드러진 시대이다.

88년부터 한국인기업들은 ‘값싸고 온순한 노동자’를 찾아 인도네시아에 대거 진출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이르러 베트남과 중국이 주요투자지로 추가되면서 자본의 동아시아 진출이 러시를 이루게 된다. 이런 가운데 현지 한인공장에서 현지노동자들의 인권침해 소식이 전해지고 이에 따른 현지 노동단체들의 반발과 지원요청이 답지하면서 해외 한국기업의 인권침해는 운동단체들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시급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참여연대가 95년부터 한국해외진출기업문제 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동남아와 중국에 투자된 한인기업의 인권침해 문제를 조사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참여연대의 활동은 한국 주도 동아시아 사회운동연대의 선구적 사업 중에 하나였다.

또한 90년대 이후부터는 한국자본주의가 아시아의 외국인노동자들을 끌어들여야만 가동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최근에는 동아시아 여성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거주하는 ‘동아시아적 인구재생산’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이러한 아시아 여성 및 노동자의 한국러시는 수백개에 달하는 외국인노동자 및 이주인권운동단체의 출현을 유발하였다. 요컨대 한국과 동아시아간 자본과 인구의 이동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변화는 결국 ‘동아시아 속의 한국’과 ‘한국 속의 동아시아’에 대한 성찰과 함께 공동실천을 자극하게 됐다.

한편 한국 경제의 위기상황도 동아시아 연대의 필요성을 제고시켰다. 97년에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이 함께 경제위기를 맞이하는 상황은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낳으며 각국의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을 고양시켰다. 특히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이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이를테면 민주노총이 동남아지역의 노동운동에 대한 조사단을 파견하고 보고서를 발간한 것이나 아시아초국적기업감시네트워크(ATNC)에 관심을 갖고 참여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동아시아연대운동은 정치외교적 계기를 통해 가속화되었다. 그것은 바로 ‘위로부터의’ 동아시아지역협력의 심화이다. 아세안(ASEAN)+3(한·중·일)을 추진축으로 하는 정부간 지역협력은 경제위기 이후 날로 강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간 동아시아지역 협력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회운동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참여와 영향력 행사는 좀처럼 실현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아시아연대를 주장하면서도 주로 유엔 산하기구들을 협력의 대상으로 고려하고 아시아의 지역협력기관은 진공상태로 내버려두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동남아의 사회운동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 아세안을 상대로 압력과 교섭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방콕에 사무국을 둔 포럼아시아의 이성훈 실행소장의 말처럼 “한국에서 동아시아연대는 담론이고 동남아에서는 현실”인 셈이다.

한국시민사회의 동아시아연대운동은 역사가 짧고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이웃 국가들로부터 연대활동에 대한 요구는 늘고 있다. 한국이 서구에 비해 지리적으로 가깝고 한국 사회운동의 목표와 과제가 자신들과 유사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도네시아 사회운동가들은 2004년 총선시기에 한국의 낙천낙선운동을 ‘수입’하여 조직적인 캠페인을 전개한 바 있다. 그들은 양국 활동가의 교류방문이나 연수 기회 확대를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성급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을 한국 노동운동 ‘팬클럽 회원’이라고 표현하는 태국 여성노동운동가 렉(Lek)은 “팬클럽 회원들이 한국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아시아연대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동아시아에 대해 잘 모른다. ‘전태일평전’을 번역하고 있다는 렉은 한국 활동가들이 ‘형제’보다는 ‘큰형’처럼 행세하려 하거나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며 타문화에 대해 다소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는다. 한국 노동운동의 ‘아시아 리더십’을 기대한다는 태국의 중견활동가 솜욧(Somyot)도 한국 노동운동이 아시아전체의 이슈가 아니라 국내적 관심사를 밖으로 들고 나오는 한계가 있다고 비판한다.

동아시아연대운동은 우리 것을 알리고 고수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배워나가고 변할 것을 요구받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우리가 동아시아를 이미 알고 있다는 식의 생각이나 그들도 우리가 지나온 길을 그대로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은 서구의 근대화론을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서로 배우려 하지 않으면 연대운동은 발전하기 어렵다.

태국서 ‘임을 위한 행진곡’ 울려퍼지다

방콕에는 태국노동자박물관(Thai Labour Museum)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장소가 있다. 비록 태국가이드북에는 빠져있으나 화려한 왕궁과 흥청대는 술집에 가려진 태국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은 노동사의 측면에서 고대, 근대, 현대의 태국사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재현하고 있다. 이곳의 관리는 태국사회운동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노동자밴드 파라돈(Paradon)이 맡고 있다. 이 때문에 박물관을 방문하면 덤으로 민중가수들을 만나고 그들의 음반을 구입하며 사인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기회도 가질 수 있다.

태국노동자박물관의 6개 방 중에서 하나는 태국노동가요사에 관한 기록영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 영화에는 노동가요 4곡이 소개되는데 마지막 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에 태국어로 가사를 붙인 ‘솔리대러티’(Solidarity:연대)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영어로 소개한 뒤에 한국 노동자들의 시위장면과 함께 원곡이 흘러 나온다. 곧바로 대만판·홍콩판에 이어 태국어로 된 노래가 연주된다. 처음 이곳을 찾는 한국인 관람객들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한류의 시초가 4·19혁명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60~70년대에 서구와 제3세계에서 들불처럼 번진 학생시위의 원조가 바로 4·19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래에 있어서 한류의 원조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런데 태국의 노동자밴드가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에는 아시아 연대에 대한 희구가 담겨있다. 1990년대에 한국을 찾은 태국노동정보센터소장 솜욧은 한국의 어느 대학교에서 처음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노래 테이프를 태국으로 가져가 계층의 연대를 통해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내용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노동자밴드 파라돈의 공식음반에 수록됐다.

그 뒤 이 노래는 각종 집회와 기념식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면서 널리 유행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태국으로 건너가 노래의 운율이 비장한 원본을 탈피하고 경쾌하게 변형됐다.

그래서 태국의 노동자들은 이 노래를 들을 때 활기찬 율동을 섞곤 한다. 솜욧은 “이 노래를 활동가교육 때 즐겨 불렀다”면서 “그것은 한국의 광주항쟁과 노동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며 국제연대의식을 고양시키려 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숌욧의 이야기는 동아시아 연대에서 한국 사회운동의 책임성과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 이 칼럼은 경향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사회학부 교수,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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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시아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등 아시아를 다시 지리적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 이런 분류를 하는 동안 아시아에서 잠시 잊혀져 있던 국가가 바로 징기스칸의 나라, 몽골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아시아계 이주인들 중 몽골인이 2만명을 넘어섰다고 하면 모두 놀라는데, 생김새가 워낙 비슷해서인지 주변에서 몽골인을 보았거나 만났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만큼 몽골인은 우리와 비슷하고 가까이 와있지만, 우리는 아직 그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체제 전환’이나 형식적 혹은 절차상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되면, ‘민주주의의 공고화’ 내지 ‘실질적인 민주화’라는 과제에 부딪히게 된다. ‘민주화’ 자체가 곧바로 민주주의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몽골역시 헌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는 이미 갖추어졌지만,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운용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몽골은 1992년부터 신헌법에서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대통령을 국가수반으로 한 의원내각제 형태를 갖추었다. 몽골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이행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신생 민주주의 국가이다. 오래된 유목민의 생활풍속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강하며, 수동적인 국민성과 국가를 숭배하는 전통은 과거 전체주의 지배에서부터 널리 퍼져있던 현상이다. 몽골은 미국에서 흔히 말하는 “God bless you"라는 표현대신, "State bless me"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강하다고 한다.

몽골에서는 사법제도도 아직 미숙하고, 행정부의 행정서비스도 관료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의회의 법안 작성 과정도 투명하지 않다. 농촌 인구가 점차 도시로 유입되면서 농촌의 빈곤은 심화되어 가고,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연계가 닿아야 하는데, 특히 정부 기구나 국영기업에 취직할 때는 더욱 심하다.

1990년부터 시민단체, 기관, 협회들의 설립 과정이 왕성해지며, 2000년도에 공식적으로 1,800여개의 비정부조직이 등록되었다. 2005년의 경우 4,700여개의 비정부조직이 법무부에 등록된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사회에 대한 최근 조사결과 인구의 거의 절반(약45%)이 최소한 하나의 비정부조직 회원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몽골의 NGO는 주로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을 기반으로 설립되어 있다. NGO의 80%가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있고, 이들 NGO는 청소년, 아동, 여성, 가족, 인권, 사회복지, 국제협력 등의 이슈를 위해 일하지만, 지역사회 발전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몽골 NGO의 특징은 정당 소속이거나 정당을 후원하는 활동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몽골 정치의 최대 난제는 부패 척결이다. 2004년 조사에 따르면 몽골 국민의 88.9%가 부패가 몽골 전국적으로 만연하고 있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몽골의 부패지수는 3.0으로서 부패가 거의 통제되지 않는 정도이다. 2005년 10월에 수행된 조사에서는 국가 관료가 가장 부패한 집단으로 집계되었다. 최근 정계와 사기업간의 연계가 강화되면서 정경유착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몽골은 민주적 제도들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의 둔화와 민주적 제도들 속에 위치한 부패의 고리 등으로 인해 제도의 운영이 민주적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몽골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의 과거 정치를 떠오르게 한다.

최근 몽골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만과 시위운동이 커지고 있다. 특히 국회입법안을 무효로 하거나, 정부 고위직 인사들에 대한 사임 압력을 가하는 등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운동이 활발하다. 몽골의 전통적 문화인 국가에 대한 신봉이나 NGO와 정부 및 정당과의 친밀한 관계는 순수한 NGO로 거듭나기 위해 넘어서야 할 과제이며, 진정한 시민사회 정착을 위한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점이다. 몽골의 시민사회를 고민해보면서, 지금 현재 한국의 시민사회와 NGO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은경(한국여성개발원 전문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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