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에 대하여 아시아 인권활동가들
한국정부에 책임자 처벌 및 강제철거 중단 요구

유엔 인권옹호자관련 특별 보고관 역시 지난 촛불시위와 용산참사에 이르는  경찰의 폭력진압 및 인권후퇴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시
 
     
 촛불집회과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인권침해 상황에 대해 지난 7월 방문조사를 벌였고 아시아지역 인권 및 개발단체인 Asian Forum for Human Rights and Development (FORUM-ASIA)가 주최하는 제 3회 아시아 지역 인권옹호자 포럼 및 아시아 태평양 지역 여성인권옹호자 협의회(3rd Regional Human Rights Defenders Forum and the Asia-Pacific Regional Consultation on Women Human Rights Defenders)가 2009년 1월 18일부터 20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개최되었다. 이 포럼에 인권옹호자의 상황에 관한 유엔 특별 보고관(UN Special Rapporteur on the Situation of human rights defenders)인 마가렛 세카야(Margaret Sekaggya)씨가 참석하여 아시아 지역 인권옹호자들의 상황에 대하여 의견을 청취하기로 함에 따라 한국NGO도 참가단을 파견하였다.

한국 참가단은 1월 20일 오전 인권옹호자 포럼을 통해 발표한 한국 인권상황에 대한 브리핑에서 당일 오전에 발생한 용산 참사를 긴급하게 소개하면서 한국의 인권상황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한국 인권상황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촉구하였다. 한국 참가단의 발표를 통해 자신들의 주거권을 지키려다 경찰특공대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철거민들의 희생을 접한 아시아 16개국의 61명의 활동가들은 적절한  보상도 없이 개발로 인해 많은 한국의 도시빈민들이 건설회사가 고용한 용역깡패들로부터 위협을 받아 왔으며 경찰은 용역깡패의 폭력에 대해 묵인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성명서를 통해 한국정부의 살인적인 진압작전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한국정부에 관련 책임자를 처벌할 것과 추운겨울에 철거민들이 적절한 대책도 없이 자행되고 있는 강제철거 중단, 인권옹호자들에 대한 경찰폭력 중단을 요구하였다.  (아래 성명서 파일 첨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엔 인권옹호자관련 특별 보고관과 면담중인 한국NGO참가단

1월 20일 오후4시부터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유엔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과 한국참가단과의 면담에서 한국 참가단은 촛불 집회 과정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뿐만 아니라 인권옹호활동을 벌이던 변호사와 국가인권위원회 직원, 의료진, 기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경찰폭력이 결국 1월 20일 오전에 발생한 용산 참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우선 지적하였다. 또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활동가들을 비롯한 많은 인권옹호자들이 현재 사법 처리되고 있으며 이러한 정부의 탄압은 과거 20년 전 군사독재정권 시절과 매우 유사하다고 설명하였다. 더욱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집회 및 시위의 자유, 언론 및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언론인 해직사태 및 정부에 반대하는 프로그램 제작 중단, PD수첩에 대한 수사, 미네르바 구속을 포함한 네티즌들에 대한 무차별 수사 등은 사실상 한국정부가 인권옹호자들의 활동을 온라인과 현실에서 모두 봉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한국정부가 이러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가인권위원회와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국제인권단체들의 권고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유엔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실과 표현의 자유 관련 유엔특별보고관실의 질의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한국 참가단은 현재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가 ICC(International Coordinating Committee of National Institutions for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의 부의장국가이자 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ICC로부터 'A‘등급을 받은 국가인권기구임에도 현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과 예산을 축소하려 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지난 20년 동안 한국이 점진적으로 인권상황을 개선해오면서 현재, 한국이 현재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 재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강경화 유엔인권 고등 부판무관을 배출한 국가로써 국제사회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있음에도 현 정부가 집시법, 통신비밀보호법, 국정원법등을 개악하고 사이버모욕죄를 도입하는 등 심각한 인권후퇴를 시도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유엔차원의 특별한 관심이 필요함을 설명하였다. 이에 유엔 인권옹호자 특별 보고관 마가렛 세카야씨는 지난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제7차 국가인권기구대회 때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한국정부와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회준비와 활동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소개하면서, 급격히 한국의 인권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에 놀라움과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후, 한국NGO들이 유엔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실에 한국 상황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락 및 협의를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1. 한국 참가단

-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 김남근 변호사
-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나현필 상임활동가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권운동사랑방, 참여연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invalid-file

아시아 연대 성명



용산 철거민 강제진압 희생자들을 추모합니다
Posted by 영기홍
,

박해받는 파키스탄 여성과 종교적 소수자들의 인권변호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름 : Asma Jehangir(Asma Jahangir) (1952 ~ )
국가 : 파키스탄 (Pakistan)
분야 : 여성 인권, 소수 종교자, 아동 인권





여성에게 명예살인이 이루어지는 나라, 파키스탄

제2차 세계대전 후 약 100년간 인도대륙을 지배하였던 영국의 통치가 끝나자, 인도에서 이슬람교도의 이익 옹호와 나라 건설을 위해 1906년 무슬림연맹이 조직되었다. 무실림연맹은 이슬람 인구가 많은 파키스탄의 독립을 요구했고 1947년 8월 인도국민회의파·무슬림 연맹·영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인도 독립법이 제정되었다. 그래서 동·서 파키스탄과 인도는 분리하여 영국연방 내의 자치령으로서 독립한다. 이렇게 시작한 파키스탄은 인구의 97%가 이슬람교도인 독실한 이슬람 국가이지만, 동시에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과 평등권이 심하게 침해받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아주 심각한 수준인데, 이는 파키스탄의 Hudood 법과 신성모독 법의 역할이 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후두드(Hudood) 법은 1979년 하크(Zia-ul-Haq) 군부 독재체제의 ‘이슬람화’ (Islamization process)정책의 일환으로 처음 실행되었다. 코란(Quran)과 순나(Sunnah)를 기반으로 하는 이 법은 혼외정사, 즉 간통을 벌하는 법안이었다. 하지만 이 법은 성폭력의 희생자인 여성들을 도리어 가문의 명예라는 이름 하에 “명예살인”을 하고 있다.

명예 살인은 가족이나 부족에 의한 그 구성원에 대한 살해행위이다. 이는 주로 이슬람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옷차림을 하거나, 특정 성범죄에 연루되어서 구성원이 가족, 부족, 혹은 그 사회에 불명예를 끼쳤다고 판단될 때 행해진다. UNPF(The United Nations Population Fund)는 전 세계적으로 명예살인의 희생자가 연당 최고 5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키스탄 국무총리 사우카트(Shaukat Aziz)의 조언자인 니로파르(Nilofar Bakhtiar)에 따르면 2003년 1,261명의 파키스탄 여성이 “명예살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2004년 12월 국내외의 압력에 의해 파키스탄 정부는 “명예살인”의 살해자를 7년의 징역 또는 극단적인 경우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여성인권단체들은 이 법이 단순히 가해자들로 하여금 피해자의 친척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죄를 벗어나게 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명예살인의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의 친척이기 때문이다.

2006년 후두드법의 개정안이 통과되고 이어 ’여성보호법안(Women's Protection Bill)‘이 통과되었지만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 속에 파키스탄에서 여성의 인권이 가족의 명예라는 이름하에 심각하게 위협받는 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해받는 파키스탄 여성과 종교적 소수자들의 인권변호인, 아스마 자하져(Asma Jehangir)

파키스탄의 국가인권위원회(Human Rights Commission) 의장이자 인권운동가,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하고 있는 아스마 자하져(Asma Jehangir)는 박해받는 여성과 소수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녀는 살해 위협 속에서도 파키스탄 인권위원회의 다른 인권 활동가들의 도움에 힘입어 평생 여성과 종교적 소수자 그리고 아동의 인권을 위해 활동해왔다. 특히, 그녀는 성폭행 피해자, 남편에게 학대 받은 아내, 종교적으로 박해 당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돕고 있다.

아스마 자하져(Asma Jehangir)는 1952년 파키스탄 라홀(Lahore)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운동의 역사를 지닌 가문의 내력 때문인지 그녀는 정치에 일찍 눈을 뜨게 된다. 파키스탄군의 전직 대령이었던 그녀의 아버지, 말리크 지라니(Malik Jilani)는 전역 후에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방글라데시에 주둔하고 있는 파키스탄 군에 대해 비난했다는 이유로 그는 여러 차례 감금되었다. 그때 18살인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 첫 석방 탄원서를 제출하고 변호사들과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싸우게 된다. 이는 그녀에게 법과 정치에 대해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는  1978년 법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녀가 28살이 되된 해, 라홀에서 그녀의 동생, 그리고 다른 두 여성과 함께 파키스탄 최초의 여성 법률 사무소를 개업한다. 대부분의 그녀의 고객은 여성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자하져와 그녀의 동료들은 파키스탄 전통적인 악습과 관행이 여성들을 짓누르는 사회 속에서 여성의 권리를 대변하곤 했다. 같은 해 그녀는 Women's Action Forum(WAF)를 설립한다. 1983년에는 그 당시 발생했던 소피아(Safia Bibi) 사건에 대한 항의로 열린 WAF의 첫 시위에 25~50명의 여성들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소피아(Safia Bibi) 사건은 맹인여성인 소피아가 강간당한 후, 이슬람교의 혼외 교섭법(Zina)에 의해 범죄자들이 투옥되는 대신 오히려 소피아가 투옥되었던 사건이다.

그녀의 사무실이 커갈수록 자하져는 파키스탄을 변화시키기 위한 좀 더 큰 노력에 뛰어들게 된다. 그녀는 하크(Zia-ul Haq)의 군사독재정권에 두려움 없이 맞서 싸웠고, 1984년 결국 난동의 혐의로 체포되기도 한다. 1986년 그녀는 파키스탄 인권위원회(Human Rights Commission of Pakistan)를 창립하고 여성, 어린이, 소수그룹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와 침탈을 증언하고, 파키스탄을 국제 인권기준에 맞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그녀의 삶을 헌신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부에 의해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2006년 9월 29일 출처: © Amnesty International)

자하져, 후두드법과 신성모독법에 대한 비판

1980년대에 실행된 이슬람화 정책(Islamization process)으로 공표된 새로운 법에 따르면, 남성을 강간의 혐의로 기소하는 파키스탄의 여성은 반대로 지나(Zina)에 의해 피해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인권단체에 따르면 파키스탄에서 감옥에 있는 여성의 80%이상이 이러한 죄목으로 수감되어 한다. 자하져의 로펌은 이러한 여성들에게 조언을 건네고, 여성을 탄압하는 법에 맞서 이들을 변호해 왔다. 그녀의 무료 원조센터는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책자를 만들고, 여성들의 현 상태와 법적인 대응책을 교육하는 변호사 보조팀을 가지고 있다.  

파키스탄의 신성모독법은 그것이 남용되어 지는 면에 있어서 악명이 높다. 부당한 혐의의 희생자들(문맹의 젊은이들과 개인적인 상호복수의 대상들- 크리스찬과 무슬림의 경우같은)은 법정으로 끌려오고, 구타당하며, 심지어 광적인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당해왔다. 자하져는 이 법을 “끔찍하다”라고 비판하고, 대법원에서 중요한 승리들을 이끌어내며 악법의 희생자들을 변호해왔다. 한 예로 1995년 자하져는 한 이슬람교 모스크에 모독적인 낙서를 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살라마트(Salamat Masih)라는 14세의 기독교인 청년을 변호하는 것 때문에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1999년에는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하려고 했던 여성의 이혼신고 절차를 돕는 와중에 다시 한번 살해위협을 받기도 한다. 그녀는 는 이혼하기 위해 그녀의 가족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가족은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계속 이혼을 요구하자 가족들은 그녀가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다며 그녀를 청부살해하고 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스마 자하져(Asma Jehangir) 연설장면

1994년 자하져는 파키스탄의 최초의 여성판사직을 제의 받으나, “내가 법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을 지키는 판사가 된다는 것은 위선적인 일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그녀는 1995년 수상한 Sitara-I-Imtiaz상을 포함하여 여러 국가적 상을 받았다. 인권운동가로써의 그녀의 활동을 인정받아 1992년 American Bar Association International Human Rights Award, 1995년에는 Martin Ennals Award과 Ramon Magsaysay Award을 수상하였다.

자하져의 체포와 국제사회의 반응
 
2007년 11월 유엔 고등 인권이사회에 따르면 자하져는 파키스탄 대통령의 긴급조치에 따라 다른 법조계, 정치적 인사들과 함께 수감되어져 있다고 한다. 당시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500여명의 법조인, 야당 정치인, 인권 운동가들이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러한 파키스탄의 긴급조치에 대해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은 파키스탄 정부에 유엔 인권 전문가를 포함한 구속자 모두를 석방할 것을 요청하고 민주주의로 돌아가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대리인에 의해 발표된 성명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은 “아스마를 비롯해 유엔 특별조사단을 포함한 수백명의 인권 활동가와 반대 정치인을 구속한 조치에 큰 유감”을 표시했다.  

“상황은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엘리트 리더십이나 정치적 리더십, 또는 정부기관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사회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삶의 모든 측면에서 싸워왔기 때문입니다.” - Asma Jahangir, Farahnaz Junejo와의 인터뷰에서, Zameen, 12월 1997년. 

그녀는 긍정적이다. 투쟁의 결과물이 현실과의 타협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다원주의와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강한 믿음은 나라의 종교적 보수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Further Information:
www.ahrchk.net/ua/mainfile.php/2007/2653/
www.jazbah.org/asmaj.php
en.wikipedia.org/wiki/Asma_Jahangir
http://word.world-citizenship.org/wp-archive/252


정리: 이경철, 최유미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Posted by 영기홍
,

아시아가 보는 한국 민주주의 위기

아시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퇴보를 우려하고 있다. 한때 한국 민주주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 대열에 서있다는 평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런 호평을 기대하기 어렵다. 현 정부가 출범한 작년부터 주로 인권 후진국을 상대로 활동을 하던 국제앰네스티나 '포럼 아시아'와 같은 국제인권기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인권지수 악화를 경고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필자가 이전에도 강조했지만 '결손 민주주의', '선거 권위주의', '경제 헌정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행보는 한때 한 나라를 기업화하려고 시도하였다가 파국을 맞고, 마침내 자국의 정치를 악순환의 굴레로 다시 밀어넣은 태국의 탁신 전 수상과 그가 이끈 타이락타이당을 연상케 한다.

태국의 경우 1990년대는 새로운 시민사회가 출현한 중요한 시기였다. 정치적 공간이 확장되고 '저항정치'가 발전하였다. 언론의 자유도 확대되고 토론문화가 확산되었다. 새로운 단체들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고, 보다 다양한 요구가 정치영역에 반영되었다. 더 많은 대중들이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참여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대자본에 이러한 흐름은 위협적이었다. 과거 침묵하고 있던 농민들이 국가가 자의적으로 도시 성장을 위해 천연자원을 투입하는 것에 반발하고 나섰다. 자유주의적 운동과 공동체주의적 운동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종식과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민감한 정부를 희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시민사회운동은 1997년 신헌법, 교육 및 보건개혁, 분권화와 같은 의제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탁신은 집권 초기에는 시민사회진영의 개혁 의제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적대감이 그의 정치이념과 무관한 것이 아니나 그를 둘러싼 대자본의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탁신은 예전보다는 좀 더 균등하게 성장의 결실을 나눠야만 대중적 지지를 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식을 시민사회 주도가 아닌 국가 주도적인 것으로 고착시키려고 했다.

그러기에 탁신은 1990년대 내내 성장해온 자유주의운동, 공동체주의 운동과 부닥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탁신정권은 의회내 절대의석을 기반으로 그동안 확장되어온 정치적 공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1976년 민중학살' 직후 시기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언론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끼까지 했다. 반대자들을 협박하고 길들이기 위해 군이 정치적으로 다시 활용됐다. '마약과의 전쟁'에 따른 대량 살상은 군사독재 시절 처럼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있으면서 이를 언제든지 악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항적 행동'은 여지없이 채찍을 맞았다. 무슬림이 많이 사는 남부지역에서는 촌락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심지어 인권 변호사까지 실종되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공공연하게 모욕을 당하거나 말단 공무원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탁신에게 민주주의는 성장의 도구일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는 법치를 '경영'의 종속변수로 보았다. 주로 법안을 통해서 혹은 과거 '안보국가'가 행했던 낡은 수법인 은밀한 방식으로 저항정치를 압박하였다. 또 규칙과 돈과 공권력을 수단으로 언론매체를 통제하였다. 특히 뉴스 내용에 대한 치밀한 관리를 통해 반대 목소리를 차단했다.

한마디로 탁신은 나라를 '기업'으로, 통치를 '경영'이라고 사고하였기에 국민들을 권리, 자유, 열망을 갖고 있는 시민이 아닌 소비자, 주주, 생산요소로만 간주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러기에 탁신은 시민사회로부터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대열에 있던 태국 민주주의를 반세기 전으로 되돌려, 또다른 일당국가체제를 만들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테면 2003년에 인권 문제에 관련한 유엔의 비판이 있자 탁신은 "우리는 독립국가이고, 어느 누구한테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이다. 태국 국민은 단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맞대응했다. 그렇지만 시민단체들은 탁신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이 아닌 "빈민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2002년 초에는 22명의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44명의 외국인 활동가들이 조직범죄를 다루는 '돈세탁방지청'의 수사를 받고 있음이 드러났다.

탁신은 거듭해서 반정부성향의 시민단체들을 부당한 수법으로 해외 후원금을 챙기는 말썽꾼으로 묘사했다. 그는 자신들의 정책에 동조하는 시민단체들과는 협력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시민단체들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발언을 해댔다. 같은 해 초 정부는 시위 단속을 위한 보다 강력한 법적 장치를 모색하였다. 구체적으로 사전에 허락받지 않은 시위를 범죄시하는 법안을 만들려다가 여론에 밀려 포기하였다. 이미 폐지된 반공법과 유사한 보안법을 입안하려 하다가 이 역시 여론에 밀려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탁신정권은 반테러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보다 큰 불만은 방송, 신문분야로부터 나왔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티비(iTV)의 예이다. 아이티비(iTV)는 1996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방송매체로 출범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 직전에 자금압박에 시달리면서 결국 탁신 가문 소유의 회사에 넘어가게 되었다. 2001년 총선 직전에 아이티비(iTV) 방송사 기자들이 탁신의 선거 보도 간섭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즉시 20여명이 해고됐다. 2003년 9월에도 정치적 간섭에 반발하였다는 이유로 또다른 아이티비(iTV) 직원들이 해고됐다. 방송의 성격은 점점 오락 프로그램 중심으로 바뀌었다.

탁신의 언론매체 간섭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TV 방송사들이 기업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차원에서 부정적 뉴스는 줄이고 좀 더 긍정적 뉴스를 보도할 것을 주문하였다. 마침내 보도범위를 정부사업에 맞추고 정부에 부정적인 보도는 뺄 것을 요구하는 메모가 모든 라디오, TV 방송사에 보내졌다. 하나의 예로 메모 중에는 "민영화 반대는 방송되어서는 안된다"는 문구도 있었다. 자연히 모든 방송사들이 뉴스 프로그램을 줄이고 대신 정부행정, 범죄, 인물 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늘렸다. 당연히 저항정치나 비제도권 정치가 보도될 수 있는 여지가 좁아졌다. 반면 오락 프로그램, 특히 게임 쇼 프로그램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렇듯 의회내 절대의석을 갖고 오만과 독선의 정치를 펴던 탁신정권도 '애국'을 기치로 내걸었으면서 자신은 세금 한 푼 안내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주식을 외국기업에 판 '배신' 행각이 발각되자 방콕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봉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군부 쿠테타로 붕괴하였다. 이때 절대의석을 기반으로 독선을 일삼았던 탁신과 타이락타이당은 지식인과 대중들에게 절차적 민주주의,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깊게 남겼다. '좋은 쿠테타'도 있을 수 있다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까지 횡행하게 됐다.

현재 태국 사회는 친탁신 진영과 반탁신 진영으로 두 동강 나 있다. 왕실과 군부의 위상이 다시금 현저히 높아진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실종됐다. 주목할 것은 적지 않은 이들이 이렇듯 '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재앙의 기원을 "국가가 회사이고, 회사가 국가이기에 경영방식도 같다"는 최고경영자(CEO) 발상으로 독선과 전횡을 일삼던 탁신정권의 과오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리고 그 우려의 대상에서 한국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정치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를 능사로 여기는 식의 '기업가적 발상'으로 국가를 경영하였다가 전면적인 대중적 저항에 직면하면서, 결국 자국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버리고, 스스로도 파국을 맞고 만 태국의 탁신 전 수상과 타이락타이당의 대과(大過)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박은홍/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Posted by 영기홍
,

탁신은 물러나고 민주당이 집권했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던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소속 반정부 시위대원들이 지난 3일 점거 농성을 풀고 공항을 떠나면서 환호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2008년 1월 팔랑쁘라차촌당(PPP) 집권 후 태국 정국은 극도로 불안했다. 반 탁신 세력 국민민주주의연대(PAD)는 탁신의 대리인 정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총리 퇴진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왔다. 정부청사 점거, 비상사태 선포, 헌법재판소의 싸막 총리 직위 박탈 판결, 쏨차이 총리 취임, PAD의 국제공항 점거, 헌법재판소의 PPP 등 집권 3개 여당 해체 판결 등 정국은 바람 잘 날 없었다.

집권당 해체라는 미증유 사태 후 태국 의회는 임시회를 열고 민주당의 아피시트 웨차치와 총재를 제27대 총리로 선출했지만 그 전도는 밝지만은 않다.

단기적으로 민주당 정권은 이전보다는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국불안의 최대변수였던 PAD뿐 아니라 왕실, 군부, 사법부, 기득권층의 심정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정국 불안요인은 도처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 친 탁신파와 반 탁신파 간의 갈등을 들 수 있다. 양 측은 지역적으로 친 탁신 세력이 우세한 북부, 동북부와 반 탁신 세력이 우세한 기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계층적으로는 농민, 도시빈민층과 중산층, 왕정파로 나뉘어져 있다.

지금까지는 PAD가 정국 불안의 제일 변수였다면 이제부터는 독재 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같은 친 탁신 세력이 주요 변수로 대두될 전망이다. 이미 탁신 지지자 수 백명은 아피시트 민주당 총재의 총리 선출 소식이 전해지던 날 그것이 불법임을 주장하며 의사당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의원들이 탄 차의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폭력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사실상 친 탁신 세력으로서는 민주당 정권의 출범은 용납하지 못 할 일이다. 2008년 초 PPP가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도 탁신의 대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차례 씩이나 총리가 물러나고 정당해산까지 당했으며 여전히 의회 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했으니 그 억울함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탁신도 군부의 지지를 통해 출범한 민주당 정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군부는 이전부터 PPP 정부에 대해서는 비우호적이었다. 사막과 솜차이 총리가 두 차례씩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PAD 해산을 명했지만 따르지 않아 결과적으로 정권퇴진에 기여했을 뿐 만 아니라 민주당 주도 연립정부 구성과정에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 사실이다.

연립정부 구성도 정국 불안의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PPP 당보다 의석수가 훨씬 적은 민주당 정부는 구 집권 여당인 찻타이당, 마치마티빠따이당, 루엄짜이타이 찻파타나당, 프어팬딘당 뿐 아니라 PPP 당 일부 파벌과 연정을 구성했다.

과거부터 만성적 정국불안 요인 중 한 가지는 다당제에서 기인하는 연립정부의 취약성이었다. 과반수를 차지하는 절대 다수당이 부재한 가운데 소수당과의 불안정한 내각 구성으로 연립정부의 평균수명은 1년 남짓이었다. 2007년 12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차지한 의석수는 165석(총 480석)이었으며 PPP 는 232석이었다. 비록 PPP는 소수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했지만 과반수에 육박하는 의석수를 차지했다.

민주당 연립정부는 235석(총 437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5개 정치파벌과 연립함으로써 취약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 정부 구성에서 나타난바 같이 태국 정당들은 당파의 이해에 따른 이합집산이 격심하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주로 내각직이나 지역구 예산분배 등과 같은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 왔다.

지금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는 PAD의 입장변화도 정국 불안의 또 다른 변수가 될 수 있다. PAD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부패정치를 뿌리 뽑기 위해서 현재와 같은 1인 1표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태국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임명직 의원 70%, 선출직 의원 30%로 하는 새로운 선거제도로의 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현 정권 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PAD는 정치적 지지를 철회 할 수 도 있다. PAD 주장은 궁극적으로는 헌법개정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데 친 탁씬 세력들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부패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고 망명 중인 탁씬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또 다른 목적으로 현행헌법의 개정을 요구함으로써 정국 불안이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위기도 정국의 안정을 크게 해 칠 수 있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대외적 요인은 물론이고 국내정치 불안에서 기인한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2%, 실업자는 100만 명이 예상된다. 국제공항 점거사태로 관광, 수출, 수입, 운송, 항공분야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실상 민주당이 2001년 총선에서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에게 참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제 문제였다. 민주당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에 반발하는 세력들의 불만을 규합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이었다. 집권 후 탁신이 실시한 경제정책은 비난도 받았지만 큰 지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민주당 정권 출범 직후 태국의 경제사정이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한 탁신은 앞으로 경제 CEO 총리였던 자신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다시 불러일으키려 애쓸 것이며 민주당 정권의 경제위기 해결능력은 정국안정에 큰 변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의 다양한 정국 불안요인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친 탁신과 반 탁신 세력간의 갈등에서 기인한 정치적, 사회적 분열 현상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사회통합의 중심 역할을 해 온 푸미폰 국왕의 역할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 할 수 있다. 이미 반 탁신 세력에 의해서 선점 돼버린 국왕이 갖는 정당성은 과거와 다르게 축소되어 있다.

앞으로 정치 불안은 입헌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질서와 체제변화에 대한 요구까지 촉발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얼마 전 이와 관련해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반 국왕파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탁신의 언급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김홍구/ 부산외대 태국어과 교수

Posted by 영기홍
,

아시아의 초국가적 문제와 아시아연대의 지금을 말하다

12월 17일 연중기획 아시아 포럼의 마무리 자리인 종합토론[초국가적 문제와 아시아연대]이 열렸다. 지난 3월부터 진행되어 왔던 아시아포럼은 아시아의 초국가적 이슈인 빈곤, 인신매매, 환경, 광역질병, 마약등을 다루어 왔다. 포럼의 각 주제들은 아시아의 초국가적 이슈의 발생 배경, 현상, 지역사회 및 시민사회의 대응등을 주로 논하여 왔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포럼에서 아시아 시민사회가 어떠한 대응활동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는 적었다.  이번 종합토론은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을 중심으로 아시아 연대 활동의 수준을 살펴보는 시간으로 기대가 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왼쪽부터 발제자 이재현, 이성훈, 김춘이

토론회는 세 분의 발제와 일곱 분의 종합토론자가 모여 진행되었다. 이재현(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은 포럼을 총 망라하는 발제를 했다. 이 위원은 1980년대 말부터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개별 국가들의 안보에 대한 관점이 다양해지면서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회자되었다고 말했다. 인간의 생존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의 조건의 보장하는 인간안보가 강조되면서 아시아의 초국가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은 빈곤문제, 해적문제, 인신매매, 낮은 생활수준으로 인한 광역질병확산, 무기밀매 등의 문제는 한국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아 보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SARS, 황사와 같은 환경문제나 매년 되풀이 되는 조류독감등을 보면 한반도가 아시아의 초국가 문제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 국가가 초국가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개입은 개별 국가의 행위를 감시하고 초국가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초국가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의식을 높이기 위한 역할을 해야 하며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선 시민사회간 긴밀한 협조와 연대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성훈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본부장은 국제시민사회 수준에서 아시아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접근을 하고 있는지 전달했다. 이 본부장은 제네바에 위치한 팍스로마나와 방콕에 있는 포럼아시아에서 약 10년 넘게 활동을 해온 배타랑 국제 연대 활동가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아시아연대]라는 오늘의 주제가 15년간 고민해온 주제이나 새로운 담론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못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본부장은 한국 시민운동은 김대중 정권이후  정부가 시민운동에 영향을 미치면서 시민운동이 반관반민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국제연대의 동력이 줄어든 원인이라고 지적했고 지금은 새로운 연대의 주체들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언급했다.

이 본부장은 한국시민사회의 아시아연대활동의 과제와 전략으로 1. 아시아에 대한 종합적 비전과 중장기적 실행계획을 세우고, 2.동아시아 시민사회운동의 리더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3, 동아시아 시민사회운동을 위한 인적, 물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4 국제 ngo를 활용하고 마지막으로 정부와 비판적 협력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했다.

김춘이 환경운동연합 국제연대 국장은 한국기업의 러시아 캄차타 석유개발과 필리핀 라푸루푸섬 노천광산 폐기물에 따른 환경 문제에 개입한 국제 경험을 중심으로 소개했다. 두 사례를 통틀어 김 국장은 환경운동연합이 국제연대 활동을 하면서 가진 한계성을 성찰적으로 분석하였다. 우선 두 사례에서 환경운동연합은 국내 사안이 커지면 국제이슈는 지속적으로 연대 및 감시 활동을 펼치지 못한 것, 국제연대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끌고 갈만한 조직적 뒷받침이 안되는 것, 장기간의 조사와 전략이 필요한 국제연대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 분야별 시민운동간 연계가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토론회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이후 종합토론은 아시아 포럼에서 개별 주제에 대한 발제를 해주셨던  라미경 교수(순천향대 사회과학연구소), 조성권 교수(한성대 국제마약학과), 조영희 연구원(한국동남아연구소)와 나현필 활동가(국제민주연대), 박진영 국제사업팀장(일하는여성아카데미)과  김홍우 명예원장(인류사회재건원구원), 송경재 교수(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가 참여 했다.

라미경 교수는 아시아가 연대하지 못하는 것은 연대의 경험이 없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글로벌 시트즌십(GLOBAL CITIZENSHIP)과 같은 인식을 가지고 아시아 연대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인적, 물적 역량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제도와 자원의 확충이 급선무라고 전했다. 손경재 교수는 한국 시민운동은 지역적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필요하며 아시아 지역에 따라 연대의 내용과 형식, 절차를 고민해야 한다고 전했다.

나현필 활동가는 국제연대 활동에 필요한 정보나 식견을 제공할 전문가를 시민운동판에서 찾기 힘들고 본인과 연관된 국제 회의에 재정 부족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점이나 국제연대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활동가의 고충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박진영 국제사업팀장은 여성 노동자들의 네트워크는 오랜 시간 타 분야에 비해 안정적으로 구축되었으며 현재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아시아의 여성문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단계이며 현재 교육과 같은 실천적인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고 연대활동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왼쪽부터 송경재, 라미경, 박진영 토론자


2008년 아시아포럼은 종합토론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아시아가 포럼을 통해 조금은 더 가깝게 이해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소중했다. 그러나 앎을 통해 표피적으로 만 아시아를 알아왔던 시간들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아시아가 한편으론 꽤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시아라는 끈을 놓을 수 없는 한국 시민사회의 과제와 책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시 그 질문을 따라 가야겠다. 한국 시민운동이 아시아 연대를 위한 노력과 전략을 모색하는 과제와 도전은 09년에도 계속되어야겠다. 

* 종함 토론의 자세한 내용은 '아시아 포럼' 단행본(09년 상반기 출간예정) 에서 접하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영기홍
,

My Story: 인도네시아 활동가 이야기

내 이름은 리아, 2008년 3월부터 5.18 기념재단의 국제 인턴으로서 광주에서 9개월을 보냈다. 처음 518 재단에 갔을때 한국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광주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NGO(비정부단체) SOLIDARITAS NUSA BANGSA-SNB (Homeland Solidarity- SNB) 의 프로그램 기획팀에서 일하였다. SNB는 '국내 연대'를 의미하며 주권, 평등, 자유와 같은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이다. SNB는 인도네시아의 1998년 5월 항쟁 직후인 98년 6월 5일에 설립되어 자연스레 항쟁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의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SNB는 인도네시아가 민주적이고 평등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도록 시민들이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을 높이도록 지원한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 나는 SNB에서 1년 6개월 가량 98년 항쟁의 피해자 가족들과 관련된 활동을 하였고 동자카르타, 클렌더 지역에 근거한 또 다른 피해자 가족 협회(FKKM -98년 피해자 가족 포럼)과 연대활동을 했다.

98년 항쟁은 1998년 5월 12일 대학생 위주로 구성된 1천여 명 이상의 시민들이 자카르타의 Trisakti 대학에 모여 1967년부터 1998년 까지 당시 독재정권 수하르토(Soharto)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시위중 시민들과 경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대학생 4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하게 된것이다.

Trisakti 비극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뒤이어 5월 13일부터 15일 까지 항쟁이 펼쳐졌다. 일반 시민들은 자카르타 거리의 상점과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기물을 파손을 했고 항쟁은 자카르타뿐만 아니라 팔렘방(Palembang), 솔로(Solo), 수라바야(Surabaya), 랑팡주(Lampung) 과 같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도시로 퍼져갔다.

두 사건은 인도네시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5월 21일 직책에서 물러났고, 부통령이었던 하베(B.J.Habbie) 가 수장으로 교체되었다. 수하르토의 정권이 물러난 후 인도네시아에는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집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인도네시아의 민주화가 열리게 되었다. 나 또한 SNB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미소를 보면서 더욱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위한 활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변화의 바람은 있었지만, 정부는 98년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피해자 대다수는 동자카르타, Pondok Rangon 지역에 방치되어 사망했다. 2007년 4월, 21개 시민사회단체들은 98년 항쟁의 피해자들을 위한 정식 국립묘지를 설립하도록 현 대통령 유도요노(Soesilo Bambang Yudhino) 에게 탄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 외 SNB는 98년 항쟁을 주제로 한 도서 출판을 비롯하여 전시회, 홍보 캠페인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인턴 활동 중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은 6월 10일 광주 금남로에서의 가두시위였다. 이 대규모의 집회를 통해 나는 한국 시민들이 어떻게 모이고 집회에 참여하는지 지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진정으로 차분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촛불 시위가 이루어 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촛불을 들고 운동가요를 불렀다. 촛불시위이기에 시민들은 가족들,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 함께할 수 있었다. 나는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 자리에서 역사를 배우고 경험하며,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의식하고 특히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민주화 운동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행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우리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근 10개월 간의 한국 생활을 통해 얻은 나의 경험과 지식은 한국의 서적들, 인터넷, 그 외 자료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 한국 사람들의 의식과 굳은 정신, 특히 80년 광주 항쟁으로 표출되는 한국인들의 의지는 내게 많은 영감을 남겼다.

12월 27일 나는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아직 개발 중에 있는 나라이고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이 산적해 있다. 나는 인도네시아 시민으로서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한 힘찬 내일을 준비해 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레고리 바바리카 / 인도네시아 시민 활동가·518재단 인턴, 사진왼쪽













Posted by 영기홍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대·합·니·다 
아시아 포럼 종합토론
초국가적 문제와 아시아 연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8년 연중기획 아시아 포럼<아시아의 초국가적 문제와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를 3월부터 진행했습니다. 총 아홉 차례에 걸친 빈곤, 환경, 인신매매, 테러등 아시아의 초국가적 문제에 대해 전문가 분을 모시고 각 주제에 대해 진단해왔으며 한국 시민사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논해왔습니다.

12월 17일(수), 오후 4시 경희대에서 아시아 포럼을 최종 정리하는 자리가 준비됩니다.

아시아 포럼에서 다루었던 이슈뿐만 아니라 포럼에서 나누지 못한 주제들까지 재조망해 봅니다. 또한 현재 국제시민사회가 아시아의 초국가적 이슈를 풀기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고 한국 시민사회가 아시아 연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내가야 할지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한국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 활동에 대한 경험을 나누고 한국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 활동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국제연대 활동을 하는 시민활동가 분들과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 활동에 관심이 있는 일반분들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일시: 2008년 12월 17일(수), 오후 4시
장소: 경희대학교 2층 본관 대회의실

종합토론회 개요
사회: 박영선 (참여연대 기획위원장)

 발제
① 전체적인 초국가적 아시아 이슈에 대한 조망과 이해 이재현(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② 초국가적 아시아 이슈 해결을 위한 국제연대활동과 과제 이성훈(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본부장)
③ 한국시민운동단체의 초국가적 이슈 해결을 위한 연대 활동 김춘이(환경운동연합 국제연대 국장)

 종합 토론: 아시아 초국가적 이슈에 대한 개별 내용 정리 및 식견 교류 (※비고: 포럼 발제자 및 시민사회 활동가로 구성됨)

문의: 국제연대위원회 차은하 간사 (02-723-5051, silverway@pspd.org)

Posted by 영기홍
,
버마를 찾아서 그들의 꿈을 듣는다
[양지를 찾는 사람들] 출판기념행사 후기


약 1주 전부터 기다려오던 행사였다. 버마에 관한 국내서적은 버마 역사 및 정치경제에 대한 개론서만 접했던 터라 버마 이주민의 삶이 담겨 있다는 이번 번역서가 자못 궁금했다. 더구나 버마 활동가뿐만 아니라 그 동안 버마 및 태국 국경지대 등을 방문하며 버마인들과 교류해 온 국내 활동가를 만날 수 있는 자리라니! 마침 내년 1월초에 태국 국경지대 및 방콕에 소재한 버마 민주화 운동 단체들을 방문하려는 내게 이번 행사는 여러 모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은홍 교수의 진행에 따라 행사가 진행되었음. 박은홍 교수는 버마의 현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의 주인공 번역서 [양지를 찾는 사람들(아시아출판사)]


참여연대 지하 느티나무 홀에 도착하니 몇몇 낯익은 버마 활동가 분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가락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홀 한 켠에는 서너 가지 버마 음식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샌드위치 비슷하게 만들어 빵을 둥그렇게 말아놓은 것과 고기류 몇 점을 가져다 먹는데, 이국 음식이지만 신기하게도 입맛에 잘 맞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NLD버마 활동가들이 준비한 버마 전통 음식. 달달하고 한국의 젤리와 같은 형태였다.


행사 시작 시각이 가까워져 오면서 자리가 빼곡히 채워짐에 따라 곧 행사가 시작되었다. 성공회대 NGO 대학원 박은홍 교수님이 먼저 마이크를 들어 행사 사회를 진행하는 가운데,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이신 경희대 NGO 대학원 손혁상 교수님이 마이크를 넘겨 받아 번역서 <양지를 찾는 사람들>이 ‘양지’에 드러나게 되기까지의 과정들과 함께 책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진행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손혁상 실행위원장이 [양지를 찾는 사람들] 출간 축하 인사를 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오기 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들어갔다.


다음으로 버마의 현 정치 상황에 대해 박은홍 교수님의 대략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지난 5월 군부가 국민투표를 강행하여 통과시킨 신헌법에 의해 2010년 총선거가 예정되어 있는데, 버마 민주화 세력들은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지난 90년 총선에서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의 압승이 무효화되고 군부독재가 지속되어 온 상황에서, 올해 통과된 신헌법과 이에 따른 2010년 총선거 실시는 지난 90년 총선을 실질적으로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 활동가 도임방주 님이 준비한 각종 사진과 동영상 자료는 버마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간접적인 통로였다. 태국 국경지대 난민촌 및 버마 현지를 방문하며 현지 사람들과 교류해 온 도임방주 님은 소수민족, 종교, 세대에 따라 버마 민주화 및 소수민족 분리독립 문제에 대해 차이를 보이는 다양한 시각들을 지적하였다. 즉, 버마의 소수민족 독립 및 민주화 이슈를 살펴 볼 때 여러 그룹들의 서로 다른 시각들을 폭넓게 아울러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로 불교를 믿는 버마 내 소수민족인 샨족 중에서도 젊은 층은 버마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한편, 이전 세대는 버마 연방을 원한다.

다음으로 버마 활동가와의 이야기 시간이 이어졌다. 본 출판기념 행사에 NLD 활동가들이 대다수 참석한 만큼, 버마 내 NLD의 힘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 되는지, NLD가 생각하는 소수민족 분리독립 또는 버마연방에 대한 비전은 어떠한지 등에 대한 참석자의 질문이 이어졌고, 군사정권과 소수민족 사이에서 NLD가 버마 민주화와 소수민족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떠한 지점에 위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제기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 난민 지위를 얻어 태국에 다녀온 마웅저씨가 행사에 참여해 주었다. 한국 시민사회가 버마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함께 할 수 있을지 여러 제안이 있었다.


이외에 난민 신청 거부에 대한 소송을 한지 8년 만에 마침내 지난 9월 국내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마웅저 씨가 군부 독재 하의 버마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보다도 한국의 민주화 경험이라고 역설하였다. 즉, 이러한 경험을 나누고 지속적인 관심으로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버마의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저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NLD 활동가들의 버마 경험과 한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와 여러번 버마에 다녀온 참가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번역서 [양지를 찾는 사람들]이 나오기 까지 일등 공신인 두 번역 자원활동가가 행사에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시간상 제약으로 모두의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행사가 끝났다. 자리를 떠나기 전에 이번 행사의 주인공인 번역서 <양지를 찾아서>를 한 권 사들고 훑어보았다. 고국을 떠나 태국으로 이주해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상과 그들 내의 서로 다른 소수민족, 종교적 배경들이 빚어내는 생각의 각축전이 머리 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버마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여러 국내 전문가, 활동가 및 버마 활동가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한국 내 버마와 관련해 활동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어떠한 구심점을 바탕으로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되었다. 내년 1월로 계획한 탐방에서도 나의 이러한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마웅저 씨가 강조한 것처럼 민주화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화 이후 세대인 내가 이전 세대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가운데서 현 버마 민주화 운동과의 접합을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 버마의 청년들은 버마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동시대 청년으로서의 궁금증 등을 이번 출판기념회 행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장유미(출판 행사 참가자/ 경희대 대학원생)


"양지를 찾는 사람들" 구입하기[바로가기]
Posted by 영기홍
,

11월 21일 경희대에서 윤민재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객원 연구원을 모시고, 아시아 포럼 아홉 번째 시간인 ‘인터넷과 아시아연대’이 진행되었다. 윤 연구원은 초국가적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를 해왔으며 이번 포럼에서도 ‘연대’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윤 연구원은 사회운동에서 ‘연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정리하는 것부터 매우 쉽지 않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대한 다양한 이슈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국제이슈에 대한 시민사회단체들의 관심과 활동도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IT 강국’이며 ‘인터넷을 통한 사회운동’이 활발하다는 국제사회의 인식으로 인해 한국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관심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 시민사회에서 실천적인 국제연대 활동은 빈약하기 그지 없다. 
 
우선 아시아 연대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아시아 지역을 보면 인터넷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국가가 대부분이며 언어의 차이, 문화적 가치의 차이, 민족주의적인 성향까지 보이는 아시아의 특성상 쉬이 연대의 실천적 방안을 모색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서구 사회는 30개국이 모여 라디오, TV, 인터넷을 통한 독립미디어 공간을 만들어 연대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러나 연대가 실질적으로 필요한 아시아 지역에는 인터넷 강국이라고 하는 한국조차도 물적,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독립미디어 센터를 설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미디어 매체와 인터넷 매체가 결합된 아시아 시민사회의 독립미디어센터를 두는 것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연대의 수단을 갖추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발제에서 국제이슈를 다루는 9개의 시민단체들의 인터넷 관리 및 서비스 제공 상태를 분석했다.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대부분의 사이트는 아시아 언어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고 영어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적었다. 또한 뉴스레터나 웹진등 정기적으로 영문 컨탠츠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없을 뿐더러 이들이 제공하는 컨탠츠 역시 단체 활동을 공지하고 소개하는 정도로 매우 미진하다고 평했다. 한발 더 나아가 연대활동 방식도 기계적이고 천변일률적이라고 지적했다.

윤 연구원은 촛불시위에서 시민들의 참여를 증폭시켰던 한국의 주요 사이트들의 활동성·자발성을 보면서 아시아 연대에서 한국 시민사회의 역할과 기대는 매우 클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시민사회의 수준은 허브 역할은 커녕 이를 추동할 만한 수준도 타 아시아단체에 비해서도 떨어진다고 분석했다.

윤 연구원은 사회운동의 ‘연대’에 대한 함의에 강조점을 두었다. 특히 아시아연대란 폐쇄적인 정체성을 지닌 아시아 국가들의 소통을 끌어내는 것이어야 하며 그것이야 말고 보편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경험과 종교, 인족이 천차만별로 다른 아시아에서 ‘연대’를 도구적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서적 차원에서 아시아가 가지고 있는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아시아 연대’였다. 따라서 서구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수준의 연대를 넘어 박애적인 연대, 도덕적 연대가 아시아연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대조차도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생각하며 결합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웠던 필자에게 나의 희생을 통해 (특히 한국 시민사회는 아시아 어느지역보다 인터넷을 통한 사회운동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컨탠츠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적 연대를 끌어내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적 연대’를 이끌어 내기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아직도 멀다.

(발제문은 포럼이 종료되면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

"혼수품도, 예단도, 부조금도 없지만…"
한국과 베트남의 결혼 문화 비교해보니…
  
지난 11월 17일 함께 일하는 여직원의 결혼식 식사 초대에 다녀왔다. 오후 5시에 도착하여 친지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해온 전통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신부에게 줄 결혼 축하금을 전달하면서 결혼 후 행복하게 살 것을 축복하였다. 오늘은 결혼 전날 행사로 성대하게 잔치를 한다. 친구, 친척, 이웃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결혼을 축하해준다. 부모님의 초청으로 잔치에 참석한 경우는 축하금을 부모에게 주고, 신부의 초청으로 온 경우는 신부에게 축하금을 전달한다. 축하금은 식사비에 대신하여 내는 금액이다. 대체로 축하금과 음식준비 비용이 상충하면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이다. 결혼식은 행사다음 날인 18일에 진행된다.

농촌의 결혼식 행사는 오후 2시에 신랑이 큰 아버지를 가정 대표로 하여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마중 나간다. 신랑의 가정 대표가 신부 집에 도착해서 조상제단에 절을 한 후 양가 인사를 하고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신부 친구가 함께 신랑 집으로 온다. 신부 친구는 신랑 집 마당에 임시로 준비된 천막아래서 신랑 신부와 함께 흥겹게 가요를 부르면서 논다. 신랑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마실 수 있는 녹차를 준비하면 된다. 이날 식사는 없다. 2-3시간을 흥겹게 논 후 신부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신부는 평상시의 옷으로 갈아입고 설거지를 하면서 그날부터 신랑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직은 대다수가 신혼여행은 가지 않는다. 대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는 신혼여행을 가기도 한다.

베트남의 결혼식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대체로 친구나 주위 사람의 소개로 신랑, 신부가 될 사람이 만나 일정 기간 동안 서로 교제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결정이 되면 양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을 준비한다. 가능한 배우자는 같은 동네나 가까운 곳에서 찾는다. 양가가 멀리 떨어진 경우는 드문데 왜냐하면 결혼 후 양가를 찾아가는데 경비도 많이 들고, 태어난 자녀들을 양가부모가 돌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는 함께 살아 갈 주택(방)의 확보가 우선이다. 현재 대다수의 베트남 신혼부부는 신랑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므로 신혼부부의 살림 방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도시나 시골이나 신혼부부가 자신들만의 주택을 가진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다음의 준비는 신혼살림인데, 이 역시 부모님과 함께 삶기 때문에 저절로 해결된다. 하지만 꼭 살림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부부용 침대, 조그만 옷장 겸 이불장, 작은 책상 1개이면 된다. 그리고 그 방을 예쁘게 꾸밀 장식용 사진이나 조화, 달력 등이다. 예복은 당일 빌려서 입는다. 신부는 예쁜 드레스를 빌리면 되고, 신랑은 자기 몸에 맞는 양복을 빌려 입는다. 요즘은 신랑이 양복을 자신이 구입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신부가 신랑의 부모나 가족을 위해서 예복, 예단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 신랑은 신부의 집에 보내는 함에 담배 1갑, 빈랑열매 조금, 녹차, 과자와 약간의 돈(20만~30만 원)을 넣어야 한다. 그리고 결혼 당일 신랑은 준비한 반지를 신부에게 선물한다. 요즘은 대체로 금반지 반 돈 혹은 한 돈으로 한다. 보통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비용은 100만 원 정도이다. 농촌에서는 이보다 약간 낮고 도시에서는 좀 더 비용이 높다. 반면에 신부는 거의 비용이 지출되지 않는다.

한국의 결혼식은 너무 경제적인 비용이 높다. 신혼 부부 당사자가 필요한 주택과 물품 구입이외에도 양가 부모나 가족들의 예단 비용이 많이 든다. 예단 준비 때부터 신랑 신부는 파김치가 된다. 육체적으로도 피곤하지만 심적으로 너무 부담이 된다. 결혼 후 부부싸움이 생겼을 때나, 신부와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않을 때 결정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예단에 대한 불평불만이다.

베트남에서는 시부모가 신부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농촌에서는 새로운 노동력이 확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를 모시고 살 새로운 가족이 늘었기 때문이다. 신부도 직장을 다니거나 농사일을 하므로 집안 일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침준비는 시어머니가 하는 경우가 많다.

고부간의 갈등이 있지만 시부모와 신혼부부가 따로 살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둘째 아들이 결혼을 하면 첫 아들은 분가를 하고 부모는 둘째 아들 부부와 함께 산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부모는 막내 아들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한국과 상당히 다른 문화이다. 한국에서는 장남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차남이 결혼하면 분가해서 나가는 반면에 베트남에서는 반대로 차남이 결혼하면 장남이 분가해서 나간다.

베트남의 결혼식은 허례허식이 거의 없다. 베트남 농촌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주례가 있고, 신랑신부가 입장하는 그리고 양가의 축하객이 모두 모이는 '결혼식'은 없다. 결혼행사 하루 전 식사초대와 결혼 당일 날 간단한 양가 만남과 친구들과의 한바탕 흥겨운 놀이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혼수품이 없고, 신혼부부만의 주택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결혼비용이 아주 적게 소비된다. 혼수품으로 인한 부부싸움, 고부간의 갈등은 없다.

한국의 결혼식은 엄청난 경비와 예비 신랑신부의 큰 심적 부담과 육체적 피곤함을 보게 된다. 한국도 베트남처럼 단순하고, 저렴한 결혼식은 할 수 없을까? 결혼비용이 없어서 결혼식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을 수 없을까? 혼수품과 예단을 없앰으로 고부간의 갈등을 없앨 수는 없을까?

결혼이란 양가 부모와 친인척, 이웃과 친구들의 축복 속에서 새로운 한 가정이 탄생하는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에 너무 형식과 외형을 추가하는 것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럽다. 부조금이 부담스럽고, 체면유지가 부담스럽다.

최의교 (국제개발NGO 지구촌나눔운동 베트남 지부장)
Posted by 영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