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올해 유엔이 정한 '세계 물의 해'를 맞아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물 부족을 겪는 인구가 현재의 4억여명에서 2050년에는 40억명 이상으로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러한 수자원 낭비는 물 부족과 함께 어획량 및 농작물 수확량 감소, 해안가 오염,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증가, 수자원을 둘러싼 국제분쟁 등 숱한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특히 한국이 속해 있는 아시아와 태평양 국가들은 물 부족과 오염에 취약하여 물 소비량 증가와 환경오염 확산에 대한 획기적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경우 빠른 시일 내에 물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구의 '주인'이 아닌 '세입자'입니다. 하나뿐인 지구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생활 속에서의 작은 실천이 필요하겠습니다. 오늘은 아직까지 그 사태의 결말이 보이고 있지 않은 버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양한 소수민족의 땅버마는 다수민족인 버마족과 130여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는 중국국경지방의 샨족(약 190만), 태국국경지방과 이라와디강의 황금의 삼각주 지방에 분포한 카렌족(약 220만), 중국과 인도국경지방의 카친족(약 110만),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경지방의 친족(약 60만), 태국국경지방의 몬족 등이 있습니다. 버마는 전통적으로 불교 문화(소승불교)가 중심으로 국가업무와 생활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친족, 카렌족, 카친족 등 일부 소수민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여 각기 고유의 언어와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18세기 콤파운 왕조가 버마를 통일시킨 이후, 인도에 진출하였던 영국과 3차례 전쟁이후 1885년 버마는 인도의 한주로 편입되면서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습니다. 영국은 버마의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통치를 위해 민족간 분열을 이용하였고, 소수민족들은 버마족을 또 다른 식민통치자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열통치 속에서도 독립투쟁은 고조되었는데 이중 아웅산(Aung San)과 우누(U Nu) 등이 이끄는 그룹이 두각을 나타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자 일본을 이용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손잡을 수 없다는 공산주의 계열의 원칙론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우선 과제라는 그룹의 현실론으로 노선이 분열되었습니다. 결국 현실론에 입각한 아웅산장군이 일본과 함께 영국군을 몰아냈지만 일본이 식민지배를 노골화하자,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을 결성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후 버마는 1947년 제헌의회 선거를 거쳐 1948년 1월 4일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이후 버마는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겪는데, 버마족 중심의 새 정부에 카렌족·샨족 등 소수민족이 반발, 제각기 독립·자결을 요구하여 1949년 소수민족인 카렌족이 토운구(Toungoo) 독립국의 건국을 선포한 이후, 버마족으로 구성된 정부와 카렌족, 카친족, 샨족, 몬족, 친족 등 10여개 소수민족간의 무장투쟁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대 소수민족인 카렌족은 카렌국민연합(KNU : Karen National Union)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외에도 카렌 민족해방군(KNLA : Karen National Liberation Army), 카렌 평화군(KPA : Karen Peace Army), 신의 군대(God's Army) 등이 있으며 기독교 전통의 카렌족내에 불교전통의 카렌족 무장세력으로 민주카렌불교군(DKBA : Democratic Karen Buddhist Army)이 있어 정부군에 협조하고 인권탄압에 동원되는 등 카렌족내에서도 갈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카친족은 카친독립군(KIA : Kachin Independence Army), 카친 민주군(KDA : Kachin Democratic Army), 신민주군(NDA-K : New Democratic Army - Kachinland) 등이 있으며, 샨족은 샨주남부군(SSA-South : Shan State Army-South), 몬족은 몬 민족해방군(MNLA : Mon National Liberation Army), 몬영토회복군(MRA : Monland Restoration Army) 등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마약왕'이라 불리는 쿤사의 군사조직도 마약재배와 샨족 독립투쟁에 연계되어 있습니다.
독재정권의 등장 : 민족분쟁과 반독재 투쟁의 결합
이와 같은 소수민족의 무장투쟁과 더불어 정부의 경제개발 실패에 따른 불만 등으로 1959년 미얀마 공산당과 카렌족 좌파와의 제휴가 이루어져 분쟁이 다시 확대되었고, 이러한 혼란중에 1962년 3월 2일 네윈(Ne Win) 장군이 이끄는 버마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우누 수상 등 많은 정치인을 체포함으로써 버마는 군사독재정권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버마의 분쟁은 소수민족의 독립운동과 더불어 반독재투쟁이 혼합되어 복잡한 성격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네윈은 혁명평의회에 막강한 권력을 집중시키고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 : Burmeses Socialist Programme Party)를 만들어 군·당·정이 일체화된 강력한 독재체제를 형성하였고, 1981년까지 장기집권을 하였습니다. 이후 1988년 군부가 재집권하면서 이전의 모든 기구를 폐지하고, 국법·질서회복위원회(SLORC: 현재의 국가평화개발위원회 SSPDC: 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의장이 국가 수반을 맡아 과거 나쁜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1989년 버마를 미얀마로 개명하고(이러한 이유로 반독재투쟁을 하는 세력은 버마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1990년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국민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이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연맹(NLD :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이 전체 의석수의 80%를 획득하는 압승으로 끝났지만, 신군부는 정권이양을 거부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독재 투쟁과 민족분쟁이 결합은 1988년 이후 보다 강화되었습니다. 1988년 학생시위의 진압과정에서 수십명의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8월 8일 8시 8분에 대규모 집회를 열어 시민, 학생들과 국민적으로 존경받는 승려들까지 반정부시위를 벌였습니다(이날 시위의 진압과정에서 최소 2000명에서 최대 20,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대규모 항쟁을 계기로 결성된 민주주의 민족연맹(NLD)에 각 소수민족집단들이 합류하였습니다.
신군부는 정권이양의 거부와 1990년 총선결과에 따른 국회구성을 저지하며 민주주의 민족연맹 관련자들을 체포하였고, 아웅산 수지는 가택연금을 당했다가 2002년에 수도랭군에서만 활동이 가능한 부분적 가택연금해제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민주주의 민족연맹은 태국에 버마 민주주의 민족연맹 자유지역(NLD-Liberated Area)을 두고 호주, 미국, 뉴질랜드, 영국, 일본, 한국 등 세계 각국에 지부를 건설하여 해외단체들과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으며, 1990년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과 함께 버마연방국민연합정부 (NCGUB : The National Coalition Government of the Union of Burma)라는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미국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정부시위에 적극적이었던 학생들은 전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 All-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을 1988년에 결성하고 6만여명이 태국과의 국경지역의 정글 속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이들은 맨발로 다녔기 때문에 맨발학생군(bare-foot student army)라 불리기도 합니다). 한편 1998년에는 태국의 카렌 난민촌이 카렌 반군(DKBA, 민주 카렌 불교군)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에 직면하는가 하면, 2000년에는 정부군의 대카렌군 공세로 카렌족 난민 1천명이 태국으로 유입되었으며, 2002년에는 정부군과 샨족 반군과의 2주간 전투로 150명이 사망하는 등 무장투쟁과 정부군의 소탕작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재정권의 인권유린과 고통받는 민중들
버마의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소년병(child soldiers)과 아동착취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99년 총회에서 버마 군사정권이 국가사업에 미성년자와 노인들을 강제노동시키고 있으며 노조를 광범위하게 탄압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의 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1988년 이후 두배로 증가된 버마군에 전체 20%, 혹은 그 이상이 18세 이하의 소년들이라고 밝혔습니다. "내 총은 내 키만 해요 : My Gun was as Tall as Me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버마 정부군과 19개의 반군에 속한 소년병들을 조사한 결과 정확한 수치를 낼 수는 없지만 18세 이하의 소년병이 70,000명 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들 소년병들은 가족과의 상의없이 공공장소 등에서 강요와 협박에 의해 징용되었으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부군에 속한 소년병들은 반군과의 전투참가 뿐만 아니라 소수민족 부락에 대한 방화, 강제노동의 강요, 대량학살에 참가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하지만 2003년 1월 버마 유엔대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석상에서 이러한 소년병의 존재에 대해 부인하였습니다).
식량난과 해외기업의 진출 역시 심각한 인권침해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아시아인권위원회(Asia Human Rights Commission)가 개최한 버마에서의 식량난과 군사화에 대한 민중법정(Peolpe's Tribunal on Food Scarcity and Militarization in Burma)은 분쟁이 식량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습니다. 정부군과 반군의 식량에 대한 직접적인 파괴와 약탈, 정부군에 의한 반군장악지역으로의 여행제한과 거래금지에 따른 식량이동의 제한, 잦은 군사적 충돌과 강제노동에 의한 농업활동의 제약, 말라리아 등 질병에 대한 노출과 반군지역에서의 비정부 병원이 군사적 목표가 되고 의약품 거래가 금지되어 허약한 체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식량생산활동에 많은 제약을 가져와 식량난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버마의 경제적 잠재력, 석유를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과 관광상품, 값싼 노동력 등으로 '아시아의 마지막 시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시장진출을 위한 각국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버마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국유화되어 있고, 자본진출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군사정권과 거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외국자본의 진출과정에서 얻은 이익들은 군사정권 유지비용을 충당하는 주 자금원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몇몇 NGO들은 버마로 진출하는 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거나 진출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버마에 대한 투자가 독재정권을 강화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영국의 버마 캠페인(Burma Campaign UK)은 2003년 1월 30일 버마민주화 운동단체들의 요청으로 버마에 진출했거나 진출을 고려하고 있는 기업들의 목록(dirty list)를 공개하기도 하였습니다(여기에는 한국기업으로 대우가 포함되었는데, 뱅갈만의 가스탐사와 대우자동차의 합작이 지적되었습니다). 그동안 버마는 인권탄압을 이유로 서방국가들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해왔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마약과의 전쟁'에 따라 1980년대 이후 미국과 태국은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여 독재정권을 결과적으로는 돕는 이른바 '인권외교'의 이중성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소수민족 문제는 현재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 사안입니다. 소수종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진행되어 매년 수백명의 사람들이 무차별하게 학살당하고 있으며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있습니다. 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샨족 인권기구는 지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버마 동북부지역에서 625명 이상이 버마군인들에게 강간당했으며 이중 173건은 소수민족 여성들이 붙잡혀 있는 수용소의 장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사건의 대부분은 30여만명의 소수민족이 지난 96년이래 강제 이주된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피해자의 대부분은 집단 이주지역 바깥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가 수용소에 감금된 이후 당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샨족 인권기구 보고서는 '버마 군사정부가 샨족을 협박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군인들이 아무런 제재없이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강간행위를 하도록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1984년 정부군의 카렌국민연합에 대한 공세로 카렌족 난민의 태국 이주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후 강간, 고문, 불법처형, 강제노동과 굶주림 등을 피해 1991∼92년에는 20만명의 소수민족들이 태국으로 난민생활을 시작하였고, 현재 난민은 최대 20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올해 1월에도 약 500여명의 카렌족이 정부군과 카렌국민연합(KNU)과의 계속되는 전투를 피해 태국으로 국경을 넘는 등 난민의 피난 행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난민에 대한 보호는 매우 열악한 실정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버마 인권단체인 `자유버마연합'(Free Burma Coalition)은 카렌족 어린이들과 여성 12명이 집단 피살당한 사진을 공개하였는데, 강제이주 후 2000년 4월 태국의 난민캠프로 넘어가려다 학살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1997년에는 인도국경지대 미조람지방에 있는 친족 난민들에 대해 미조람 주정부는 이들을 외국인법(Foreigners Acts)에 의거 불법입국으로 간주, 체포된 난민을 버마정부군에게 넘겼는데 이 난민들은 버마국경내에서 총살당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권상황에 대하여 유엔인권위원회는 거의 해마다 결의문을 채택하고, 많은 국제 NGO들이 버마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정권은 지속되고 있고 이로 인한 계속되는 전투와 강간, 고문, 불법처형, 강제노동 역시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고, 더욱이 지구촌 시민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고통의 신음소리는 알 수 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겪었던 일제식민지 시대의 아픔과 30여년의 군사독재, 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버마의 민중들은 지금까지도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입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의 예산이 삭감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더 많은 지구촌의 관심과 행동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한국정부는 그동안 난민인정에 대해 인색한 태도를 유지하다가 버마 전국학생회연합 간부를 포함한 버마인 3명과 카메룬 정당인(29) 등 모두 4명에 대해 난민 지위을 부여키로 지난 1월 29일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행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서로가 평등하게 같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려야하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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