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중동 북아프리카 현대사의 두 개의 키워드
                 - 석유와 미국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4월 12일,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의 두 번째 시간으로 ‘중동 북아프리카 현대사의 두 개의 키워드-석유와 미국’이라는 주제로 강의가 열렸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는 KBS <세계는 지금>의 안주식 PD가 리비아 취재 현장을 생생히 전달해 주었습니다. 곧 이어 구정은 기자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석유와 미국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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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공습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안주식 PD

먼저 취재경로에 대해 얘기하겠다. 리비아는 튀니지와 이집트 사이에 있다. 리비아를 중간으로 나누면 서쪽으로 트리폴리, 동쪽에 내가 다녀온 벵가지가 있다. 국토면적은 큰데 사람이 별로 없고 해변에만 인구가 밀집해 있다. 또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카다피가 머물며 정부군을 주군시키고 있다. 벵가지를 중심으로 반군이 국가위원회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동서를 가르는 지역에는 상호공방이 이뤄지고 있다.


1. 왜 벵가지가 반군의 중심이 됐을까?

리비아의 동부와 서부의 부족은 다르다. 카다피는 동부 부족을 중심으로 특혜를 주어 온 반면, 서부 부족은 박해를 받아왔다. 벵가지는 왕정 때 도시가 부흥했던 곳이며 반카다피 성향이 짙다. 이 곳 벵가지에서 처음 시위가 벌어졌다. 광장에서 데모가 시작되고 바로 무력투쟁으로 발전했다.
튀니지, 이집트와 다른 것은 군부의 선택이었다. 리비아 군은 철저하게 카다피에 종속되어 있고 용병이 바로 시위를 진압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벵가지 시민이 무기창고를 급습해 무장을 하고 트리폴리까지 진격했다. 내가 리비아에 들어갔을 때는 카다피군이 재정비하여 벵가지 반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2. 어떻게 분쟁지역을 취재하나

저널리스트들 사이에 ‘국경이 열렸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저널리스트들이 한 명이 들어가서 안 죽었다는 얘기다. 최초로 들어간 사람이 CNN기자다. 접경지역에 있는 사람이 차량을 제공하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장사를 하게 된다. 그 일대에 통역해주는 사람들로 난전이 이뤄진다. 시장이 형성되는 셈이다. 주로 코디네이터가 생겨 차량을 제공해준다.


3. 왜 싸우나?

대부분 반군은 비조직적이고 비계획적이었다. 쉽게 정리하면 ‘카다피가 부정부패가 심한데 왜 나한테는 한푼도 돌아오지 않느냐. 그런데 왜 때리기까지 하느냐?’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경제가 어려워서 무언가를 해보려하면 관료주의가 극심해서 뭘 못하게 하고, 억울하다고 한 마디 하면 때리는 것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반군에게는 정부군이 진격해왔을 때 물자를 수송하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석유항을 점령하는 것이 중요했다. 즉 아즈다비아 점령이 중요했다. 반군 입장에서 아즈다비아가 함락되면 벵가지가 포위되고, 대규모 학살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들어간 후에 아즈다비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군이 미디어 센터를 제공해줬는데 거기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죽을 상황이었다. 저널리스트로서 어디까지 취재를 하는 것이 맞는지를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일단 나가기로 했다. 거기에 알자지라 방송과 CNN만이 남아서 취재를 계속했다.


4. 비행금지구역과 개입의 문제

아즈다비아 함락 다음 날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됐다. 반군은 무기고에서 빼온 총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상황이었고 정부군의 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으면 반군은 다 죽을 수도 있었다. 시민도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길 원했다. 서방은 근접 포격을 하고 대규모 군사시설은 미사일로 폭격했고, 벵가지 주변도 폭격했다.

여기에서 R2P(Responsibility to Protect 국민보호책임)라는 개념을 두고 논란이 있다. 2005년에 유엔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이 개념은 코소보와 르완다 대학살이 재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이라크에 개입할 때는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를 썼다. 유엔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가 오염되어서 새로운 뭔가가 필요했다. R2P원칙의 적용은 내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내전이면 서로 무장 세력끼리의 싸움이므로 외부에서 개입할 수 없다. 리비아의 무장반군은 시민이냐 아니냐가 논란이 됐다. 그러나 리비아의 반군은 제대로 된 조직체계가 없는 시민이다. 현장에서도 느꼈지만 명백히 시민이라는 판단이 든다.


5. 주권을 침해했나 안했나

80년 광주항쟁과 북한 사례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광주와 북한문제 사이에 리비아 문제가 있다. 광주항쟁 당시 유엔이나 미국이 한국정부에 경제제재를 했다면 정부가 시민을 공격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카다피가 유엔이나 미국의 경제제재에 대해 콧방귀를 뀔 인물이라는건 국제사회가 다 알고 있었다. R2P는 시민이 요구해야 한다. 북한은 시민이 요구하지 않으므로 적용되지 않는다.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려면 북한 내부에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리비아에서는 시민의 목숨을 구했으니 리비아에서의 R2P는 정당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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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북아프리카 역사와 석유와 미국에 대해: 구정은 기자

오늘은 중동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그러나 20세기에 한정해서 설명하겠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오스만쿠르크가 이 일대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20세기는 이것이 쪼개져 나가는 과정이다. 그 사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를 차지하고 다시 독립하면서 중동지역의 20세기 역사가 만들어졌다.
 
다음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역사에 핵심이 되는 사실이다.

1. 아랍의 국가수립은 굴절되어 독재로 이어졌다.
2. 북아프리카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해서 힘들게 독립했다.
3.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이 지역 역사를 꼬이게 했다.
4. 이란은 맥락이 다르다
5. 현재 큰 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20세기 역사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1. 중동의 역사

1914년 1차 대전이 일어났는데 모두가 오스만 땅을 나눠서 땅따먹기를 했다. 터키는 거대제국이었는데 입장이 바뀌었고 1915년에 오스만이 무력화됐다. 2차 대전 후 카다피가 리비아를 집권하기까지 미국이 점령국 행세를 했다.

중동은 나세르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 지역의 영웅이다. 카다피도 '나세르 키즈'를 자칭할 만큼이다. 나세르의 범아랍사회주의가 그에게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1960년대는 독재체제의 틀이 만들어졌다. 이라크에서는 알 바크르 대통령이 취임하고 2년 후에 사담 후세인이 취임했다. 1969년에는 카디피가 리비아를 장악하고 그의 독재체제는 석유 민족주의로 간다. 1970년에는 이집트의 나세르가 사망하고 알 사다트 대통령이 당선됐다. 시리아에서는 알 아사드가 쿠테타로 집권했다. 10년 동안 아랍공화국으로 합쳐졌다가 다시 갈라지고 1971년에는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이 출범했다. 1973년에는 중동전쟁이 발생했고 1979년에 아라크 후세인이 대통령이 되고 몰락하기 전까지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 거래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미국에 영향을 끼쳤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보면 냉전시대에 이란이 미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도 중요하다.


2. 중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석유

중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이해하려면 석유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석탄, 구리, 은, 금은 전세계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석유는 1)지리적 편중성이 강하다. 2)또 채굴 비용이 커서 대규모로 투자를 해야 생산할 수 있다. 3) 석유는 (생산) 탄력이 없어 독식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미국이 석유 때문에 중동지역의 독재정권을 지지해 주었고 이 지역이 민주화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것이 이 지역의 민족주의로 이어졌다.

이라크 전쟁의 모든 이유가 석유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는 석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암 촘스키가 지적했듯이 미국의 중동 석유 이권이 유럽과 아시아의 재정을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냉전 이래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의 일환이다.

중동 독재국가는 세금이 없고, 에너지가 무상이고 교육도 무상이다. 모두 석유 수입에 기반하고 있다. 중동 독재자들은 시민들에게는 반발이 없을 정도로만 최소한의 석유 이익을 나눠주고 나머지는 자기의 이익으로 챙긴다. 석유수출은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당근이기는 하지만 중동나라들은 자원을 팔아 기득권의 이익을 챙기고 산업은 정체된 ‘자원의 덫’에 걸리게 되었다.



Q & A 안주식 PD.구정은 기자와 수강생과의 대화

Q. 리비아에서 반군과 시민군은 어떻게 구분하나?

A. 안주식 : 준정부 체제를 갖추느냐 안 갖추느냐가 관건이다. 리비아 사태는 중동전문가 누구도 예측 못 한 형태로 '조직이 없는 운동'이다. 10여 년 전부터 재야단체가 꾸준히 활동은 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 브라더스(형제단)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반정부적 행동을 할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다.

임시정부인 국가위원회도 체계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부 흥분한 시민이 친카다피 측을 축출해서 고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위원회가 주도한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국가위원회가 통제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비아 반군은 군사체계를 갖지 않고 시민연합으로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가 문제다. 리비아 반군세력에서 유일하게 무기를 쓸 줄 아는 집단이 이슬라미스트들이다. 정치체제가 와해된 상황에서 그나마 무장투쟁은 극단주의자들인 것이다. 알카에다와 비슷한 일부세력들이 국가위원회의 무장 군사훈련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앞으로 체계적으로 무장집단화될 가능성이 있고 그때는 내전이라 불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제사회의 개입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그렇지 않다.


Q.  리비아 시위대는 주로 남자인데 여자들의 역할이 있었나? 여성의 지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A. 안주식 : 중동지역은 내외를 많이 한다. 물론 참여가 있었고 여성들만 따로 모여있기도 하고 남성들이 보호를 하기 위해 둘러싸고 있어서 언론에 잘 보여지지 않은 측면도 있다.
벵가지는 젊은 청년 위주다. 이집트는 투표할 때도 남녀 따로 한다. 현재 중동은 베이비붐 세대인 30세 이하가 60%로 젊은 층이 높다. 어느 전문가는 ‘이들이 데모할 나이가 되어서 이번 시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직업 없이 30세가 된 사람이 많다. 리비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서 국제화 수준이 높고 일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수준이 높다. 여성들의 자각도 높았다.  

구정은: 리비아는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여성의 역할이 다른 나라보다 적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어서 거의 여성이 안 보였다. 이집트는 1920년부터 여성운동이 활발해 최초 여성연맹이 있었는데 근래에 이슬람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졌다. 사우디에서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돈을 주고 배우, 밸리댄서에게 히잡을 쓰고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게 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심해졌다. 페미니스트들을 탄압하고 이슬람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이란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사례들이 많지만 1997년에 부통령이 나오는 등 많은 여성의 활동이 있었다. 이란의 혁명은 여성이 이끄는 운동이라고 한다.

이번 시위를 통해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혁명을 주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세력이 이슬람조직세력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르겠다. 미완의 혁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Q. 반군이 조직화가 되지 않았을 때 노동조합이 시민진영이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

A. 구정은: 조직화되어 움직이면 정치다. 조직화가 되지 않은 움직임이기에 혁명이다. 무슬림형제단은 1920년 대에 만들어진 근대 최초의 조직으로 이번 시위에서도 조직적으로 움직인 면이 있다. 조직되어 움직이면 혁명이 아니다.

안주식 :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봤을 때 군부가 중심이었다. 튀니지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의 경우는 군부가 무바라크를 버린 형국이다. 이집트는 리비아와 다르게 군부엘리트 체제가 정치의 상당부분을 차지해 왔고 이를 계속 보장받고 있다. 대신 무바라크를 물리쳐 주겠다는 약속이 정치지도부 사이에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제2의 무바라크가 군부에서 나올 것이다. 리비아는 노동조합같은 조직력을 갖고 있는 세력이 없다. 산업구조가 달라 노동자 조직이 있을 수 없다.

Q. 중동지역 젊은이의 시위가 일자리와 관련이 있나?

A. 구정은 : 88만원은 우리 산업구조의 문제이다. 중동은 근대산업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르다. 경제구조 자체가 직업을 갖기 힘들게 되어 있다. 공무원이 제일 많다. 석유를 팔아서 나눠주는 구조로 되어 있어 공장은 아예 없다. 카다피가 일자리를 만들어 나눠줬지만 어느 순간까지만 유지되고 인구는 폭발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안주식 : 중동의 산업은 역사가 다르다. 중동은 갑자기 돈이 생기고 인구가 늘어났지 그 전에는 인구가 없다. 교역만 있지 산업을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중동은 애당초 다르다. 노동집약 농업이 가능했던 데가 아니다. 유목민이 교역하거나 유목 활동을 통해서 먹고 살았다. 최근에 석유 때문에 인구가 폭발했고, 또한 인구의 절반이 외국인이다.


Q. 중동지역에서 정치와 종교지도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A. 구정은 : 근대국가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면서 탄생했다. 그러나 이슬람 종교 자체가 독특한 면이 있다. 무슬람형제단은 불법이었는데 살아남았다. 종교주의자들이 학교와 병원을 꾸리기 때문이다. 탈레반도 학교와 병원을 쥐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뿌리가 매우 광범위하고 깊다. 중동에서 종교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구조이다. 종교는 하나의 정치 주체로 중동 사회에 들어와 있다. 그 속에서 온건주의자와 극단주의자의 성향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지역의 민주화는 종교와 같이 가야 한다. 아랍권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강좌 기록 및 후기: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다음 강의
4월19일(화) 민주화 혁명 이후 중동 북아프리카는 어디로?
강사: 구정은(경향신문기자)


*2강 강의자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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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후기]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참여연대는 4월 한 달 동안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 혁명에 대해서 강좌를 엽니다. 최근 중동의 반정부 시위는 튀니지에서 청년의 분신으로 시작해 이집트, 리비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 강의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지역과도 같았던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변화양상과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강의는 중동 현장의 경험이 많은 구정은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가 맡았습니다. 4월5일, 첫 강의에서는 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에 대해 짚어봤습니다.


리비아 사태에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바람으로: 사회자 주은경

이 강의를 기획한 것은 이집트 혁명이 승리를 이루면서 중동지역의 ‘프랑스 혁명’이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어서였다. 구정은 기자는 문화일보의 국제부 거쳐 지금은 경향신문 국제부기자로 있다. 교수보다 오히려 현장에 강한 강사라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중동 북아프리카의 혁명을 배움으로써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이나 한국인이 국제사태에 갖고 있는 감수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리비아 사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강좌의 시작: 구정은 기자

나는 중동 북아프리카의 역사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살아본 것도 아니다. 단지 10년 동안 일하다보니 이 지역 뉴스를 남보다 관심을 갖고 살펴보게 됐다. 지금은 이 지역에 많은 애정과 문화적 매력을 느끼고 있다. 비록 민주화에서 뒤쳐져 있지만 아픔을 최소화하면서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이 지역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이어서 강의가 끝나는 4월 말이면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른다. 진행되는 걸 보면서 같이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일단은 중동 아프리카의 지리를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 중동 북아프리카라고 하면 터키와 이란은 빼고 생각한다. 오늘은 북아프리카 쪽에 초점을 두겠다. 앞으로 이어지는 2,3강은 걸프 지역에 초점을 둘 것이다. 최근은 리비아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리비아는 이집트 옆에 위치한다. 리비아는 민주화 시위가 지속되어 지금은 내전상황이다.

1. 튀니지는 민주화 혁명이 아닌 시민혁명, 그리고 SNS(소셜네트워크)

일단 튀니지 혁명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것을 민주화 혁명이라고 볼 것인지 시민혁명으로 볼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민주화라는 결과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들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지금까지 이런 혁명을 볼 수 없었다’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에는 중동사회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이라 저항적이지 않다고 보는 서구적인 사고가 들어가 있다. 중동 북아프리카가 민주화에서 후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나 아랍의 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 역사적인 혁명의 시기를 겪고 있다.

‘튀니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SNS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중동 지역에는 '알자지라'라는 24시간 위성방송을 하는 방송국이 있는데 시위현장을 마치 CCTV처럼 생중계한다. 아랍어를 쓰는 국가 모두가 이 방송을 보기 때문에 이번 혁명 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분노와 억압의 강도가 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시민의 분노와 SNS의 역할이 합쳐져 촉발됐다고 볼 수 있다.

2. 무바라크 시절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혁명

이 지역은 공통점이 있다.

1) 종교는 이슬람교이고, 언어는 아랍어라는 점 2) 근대 이전까지 아랍지역이었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영토로 한 나라였던 점, 즉 광범위한 공통의 역사 3) 30-40년간의 독재정권을 겪으며 형성된 계층갈등의 심화 그리고 4) 산업 성장 기반이 없고, 외부 의존적이라는 점 이다.

이집트는 이 지역에서 중요한 나라이다. 이집트에서는 아랍연맹사무총장, 노벨상 수상자, 유엔총장 등이 나와 국제적으로 힘이 있는 국가이지만, 팔레스타인을 누르고 자국민을 억압하면서 버텨 왔다. 통계는 없지만 1/3이 유형, 무형의 미국원조로 살아간다. 독재가 지속되다 보니까 미국에도 무바라크 정권이 짐스러운 시점이었고, 시민의 힘이 압도적으로 드러나자 무바라크는 미국이 버리는 카드가 됐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미국에 달렸다’는 건 믿을 말이 못된다. 오히려 시민의 손에 달렸다. 그것이 진정한 권력 투쟁이고 이집트는 지금으로선 시민이 이긴 상태다.

지금 중동은 2차대전이 끝난 것보다 더 큰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 손으로 혁명을 만들어 가고 있다. 프랑스 혁명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이번 혁명은 시대를 앞서 가는게 아니라 마무리하는 혁명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 20년 전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사라졌어야 할 미국의 패권을 등에 업은 독재정권이 중동이라는 특수성과 석유의 이익 때문에 지속되어 온 것이다. 지금 카다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적 패러다임으로 봤을 때 이미 끝났다는 의미이다.

3. 리비아의 시민혁명

카다피가 어떻게 정권을 잡게 되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카다피는 20대 때 쿠데타로 집권한 후 42년간 권좌에 있었다. 그는 카다파 족이어서 카다피가 됐다고 한다. 그는 60-70년대 이집트 낫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랍사회주의와 부족주의 성격을 띄는 범아랍주의 성향이 강하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카다피의 패션이 체게바라와 비슷하고 사회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패션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리비아는 이슬람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국영으로 운영되는 영역이 많다. 또한 리비아는 70년 대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자마리아’ 즉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언한 바가 있다. 독특한 점은 카다피와 그의 측근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다피는 직책이 없다는 점이다. 이때까지 카다피는 권력을 잡은 후 시민에게 고문, 감금은 했지만 처음 집권과정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진 않았다. 미국도 카다피를 두고 막무가내이지만 실용주의라고 인정했다. 또한 그는 석유자원을 팔아서 아랍권을 통합하려 했고 역내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런 기반을 통해 그는 40년간 정권을 이어 올 수 있었다. 그는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대외정치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계속 보여왔지만 이집트만큼 국제정치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다.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반미제국주의 투쟁을 진행해 왔다.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일 때는 레이건 대통령 때였다. 이란의 팔레비왕조가 무너지면서 미국의 중동전략에 혼란이 왔다. 미국이 이라크를 시켜서 이란을 침공하게 만들 때 카다피는 이란을 지지했다. 이것 때문에 레이건 때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그 때부터 카다피 전복공작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이런 사건들이 없었다면 크게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테러사건의 배후였다는 이유로 트리폴리가 공습당하면서 그의 수양딸이 죽었고 90년대 말에는 중동에서는 영향력이 없어서 아프리카주의로 전환했다.

그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긴게 아니가 싶을 정도로 돌출행동을 많이 했다. 아프리카 왕같은 옷을 입고 나오기도 하고, 아프리카연합의 의장국을 맡으면서 부족장을 모아놓고 자신을 왕중왕으로 일컫거나, 외국에 순방가면서 천막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카다피와 서방과의 관계를 보면 그는 영국의 전 총리인 블레어와는 친하게 지냈다. 3년 전 총리직 그만두기 전에 리비아 유전개발권을 따 줄 정도로 친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과도 가까웠다. 리비아에서 카다피가 잘못한 게 있다면 이번에 혁명이 발발한 후 전투기까지 띄워서 사람을 죽인 것이다. 미국이 석유 이익 때문에 편을 들어 주고 싶어도 국내에서 표가 깎여서 그렇게 못하는 상황이다. ‘앞으로 리비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는 국민의 힘에 달렸다.

이집트는 인구의 97%가 국토의 3%에 모여 살고 있다. 반면 리비아는 전체가 사막이고, 사람들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결집된 시민의 힘이 없다. 지금 리비아는 카다피가 있는 상태에서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으면 카다피를 축출할 방법이 없다. 가장 좋은 방향은 인명피해가 최소화 되는 선에서 카다피가 멈추는 것이며, 리비아인의 힘으로 민주적인 새로운 정부를 꾸리는 것이다. 반군은 전력이 큰 게릴라군이 아니기 때문에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지상군 투입은 못 하기 때문에 현 상황이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카다피가 장악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4. 인도적 개입, 해야 한다 vs 말아야 한다

인도적 개입을 두고 국제적으로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군사행동이 목숨을 빼앗는 전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옳으냐 그르냐는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코소보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였다. 공습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서 누가 학살자인지 학살받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됐고 악천후까지 겹쳐 실패했다. 코소보 사태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대해 좌파지식인은 개입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90년대 시에라리온이 절망의 땅이 되어버렸을 때 영국군이 개입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군벌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학살의 주범인 라이베라 대통령을 잡아서 국제전범재판에 붙였다. 그 후 라이베리아에서는 여성대통령이 당선되었고 결과도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인도적 개입이 성공하지 못한 다른 케이스들이 더 많이 있다. 90년 대 이라크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10년 간 엠바고를 실시했는데, 이라크의 어린이와 병든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도 죄를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징벌을 주는 집단징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유엔의 금수조치 책임자였던 사무차장이 금수조치를 반대하는 일까지 생겼다. 90년대 르완다는 300만명이 학살됐는데도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또한 90년대 아프간 내전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으로 이행됐다. 이라크에는 알카에다도 없었고 대량살상무기도 없었는데 인도적 개입이라고 용어를 붙여, 결국 인도적 개입이라는 말만 오염시켜 놨다.




Q & A: 구정은 기자와 수강생과의 대화

Q. 혁명 후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나? 시민의 힘이라고 하는 데 시민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

A. 한국의 386 세대가 시민의 힘을 의심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동시에 그들은 미국의 힘을 믿는다. 이라크 전이 개시되기 전 몇 달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는 반전시위를 비롯한 움직임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한 교수나 학자,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반대해 봤자지’ 하는 회의론이 대세였다. 시민들의 움직임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건전한 시민들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의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국제사회가 반대하는 이라크전쟁을 했고, 이 과정에서 미군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많았지만, 만약 모두가 전쟁에 무관심했다면 더 심하게 사상자를 냈을 것이다. 미군 측에서 오폭 사고를 내면 시민들이 민간인학살이라고 크게 반발하면서 공습자체를 많이 바꿨다. 그것이 바로 시민의 힘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민의 힘은 작용을 한다.
 
지난 30년 동안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이집트의 경우, 부시 전 대통령은 중동민주화를 원했는데 오바마는 무바라크를 끌어안았지만 이집트 국민의 힘에 밀려 무바라크를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시민의 힘은 결정적인 순간에 보이는 것 같다. 중동에 있는 사람들은 이집트를 싫어한다. 매춘부, 사기꾼 등이 이집트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집트인들은 부패한 정권 밑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시민들 뼈 속 깊이 부패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민혁명 이후 집권한 이집트 총리는 1년 간 교통부장관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은 저명한 물리학자와 나사에서 근무한 과학자 지식인 그룹이 그 주변에 있다. 이집트에서는 시민사회가 축적한 힘이 현 상황에서도 이집트가 아수라장이 되지 않게 하고 있으며, 군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Q. 과연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하에 타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옳은가?

A. 인도적 개입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원론적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원칙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죽여도 되는 정권은 없다. 인권을 넘어서는 주권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적인 군사행동은 또 다른 인명피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리비아의 경우는 군사시설에만 폭격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정권에도 인도적 개입을 해야 하나? 평양 같이 인구가 밀집한 곳은 일반인들이 수 천명, 수 만명이 죽는 것이 뻔한 사실이다. 사건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 ‘옳다 그르다’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리비아에 대해서는 군사개입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평가가 많다. 벵가지 공습 함락 때 카다피 군에 타격을 주면서 민간인 거주구역이 아닌 곳에 폭격하는 것은 합당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점은 국제법을 연구하는 분들도 혼란스러워한다.

Q. 중동 지역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십 수년 전에 국제부에 갔을 때 막내였고 선배들이 미국과 유럽을 담당했다. 국제부에서 일하다가 사회부로 옮겼다가 다시 2001년 다시 국제부로 갔을 때 9.11이 터졌고 역시 막내였다. 그때 또 중동을 맡아서 공부를 하면서 출간된 책을 섭력하였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실크로드 그런 것들을 좋아했고 문화적 매력도 느꼈다. 막내라서 중동 아프리카 지역을 맡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느새 인생의 중심이 되었고, 국제정세 역시 지금에 와서는 유럽은 어떤 영향도 없고 변수도 아닌 상황이 되었다.

2001년 후반 9.11 이후부터는 날마다 집에 가면서 이라크 가는 생각을 했다. 요르단에 한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어느 날 비자가 나왔다. 사담후세인이 국민투표를 한 적 있는데 이 때 해외기자초청을 하면서 바로 다음날 요르단으로 갔다. 이라크에 들어가 있다가 최후통첩 때 요르단으로 나와서 이라크전을 보았다. 나야 달랑 나오면 그만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다. 인생에 가장 마음이 아픈 부분이었다. 그 다음에는 관심사가 아프리카로까지 넘어갔다.

Q.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A. 그들은 미국을 굉장히 싫어한다. 이 지역은 미국의 위선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독재정권인 무바라크 정권을 밀어주었고,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위선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역사가 7000년이나 된 세계 최초의 국가이자 문명이 중첩된 국가인 이라크에 대해 미국은 오만하기까지 했다. 미국은 한국 전쟁 때 남한을 지원했고 한국은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벌기도 하는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중동에게는 그렇지 않다.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도이지 미국을 옹호하는 것은 중동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첫 강좌를 듣고서: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우연히 몇 해 전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전을 보게 됐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국중심의 동북아 정세만 공부하던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지구 반대편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참여연대의 중동 북아프리카의 강의를 듣는 계기가 됐습니다. 구정은 기자의 생생한 강의는 이 지역의 상황을 ‘학문적 성찰의 눈’이 아닌 ‘기자의 예리한 눈’으로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받았습니다. 특히 체험담과 그 지역사람들의 시각에 대한 설명은 책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어서 값졌습니다. 지도자의 성향이나 국민성 등 체험한 사람에게만 나오는 소소한 일화들이 많아 흥미로웠습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왜’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됐습니다.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어질 두 번째 강의가 기대됩니다.


강좌 기록 및 후기: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다음 강의
4월5일(화) 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
강사: 구정은(경향신문기자), 안주식(KBS 피디)


*1강 강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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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시민혁명과 우리의 연대를 이야기하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시민혁명의 바람은 18일간의 이집트 혁명의 거대한 산을 넘어 이제 리비아를 비롯한 에멘, 바레인 등 아랍권의 모든 지역을 휩쓸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우리 모두 21세기 지구촌 혁명 역사의 목격자가 된 셈이다. 한국 사람들은 말한다. 30~40년이 넘는 1인 독재정권 아래서 아랍인들은 어떻게 위장된 평화를 유지해 왔는지. 하지만 그 말 속에서 과거 희생으로 일군 민주화를 우리가 얼마나 잘 지켜왔는지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은 한국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이집트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로, 한국 내에서 아랍권의 실태를 알리고 카이로 타히리르 광장에 모인 수백만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 한국에서 연속 시위를 조직해왔다. 그들은 한국처럼 독재정권을 몰아낸 역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보다 현 아랍권에서 일어나는 민주화의 열망을 잘 알고 지지할 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의 지난 역사 속에서 그들 자신의 혁명의 타당성과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러나 한동안 미국에 의해 ‘악의 축’으로 규정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땠는지를 뒤돌아 봐야한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를 제외하고는 초반 이집트의 혁명을 두고 이집트 사태냐, 시위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시선은 미국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이번 참여연대의 ‘대화 마당: 아랍 시민혁명과 우리의 연대를 이야기하다’의 기획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 우리의 시각으로 아랍 시민혁명을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아랍권과의 복잡한 지역적,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를 설명하신 김재명 교수님이나 현 이집트 혁명의 전후를 이집트인의 시각으로 말씀해주신 마흐무드 압둘 가파르 교수님 두 분의 발제 내용은 우리가 좀 더 현 상황에 관심을 둔다면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습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프라인 강의와 활동이 중요한 것은, 그 모임에 참여한 개개인의 이해를 높이는 것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번 아랍 시민혁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어스’ 등의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의 힘을 보았다는 것이다. 중동의 구글 직원인 와웰 고님은 ‘우리는 모두 칼레드 사이드(2009년 경찰의 부패를 고발하는 내용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사복경찰에 의해 맞아 죽음)’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이집트인들에게 시위의 결집을 촉구하는 등, 소셜 미디어는 아랍권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결집할 영감을 주었고, 다른 경우보다 이를 더 잘 활용한 사례를 보여주었다. 이집트 시위 초반, 무바라크 정부가 인터넷을 통제한 것을 보면 그들 또한 소셜 미디어의 위력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도구인가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있었던 이집트인들의 시위 중간에 마흐무드 교수님은 서구의 편견으로 무바라크 정권하의 이집트를 ‘친미’ 국가로 규정한 것에 대해 울분을 터트렸다고 한다. “친미 국가라고 해서 그 나라 사람들도 친미는 아닙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집트 민중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만듭니다. 그 어떤 외부 세력도 우리를 흔들지 못합니다”라고. 나는 민주화 실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그들의 자긍심과 줏대가 부러웠고, 또한 그들이 독재정권을 몰아낸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혁명의 모델로 삼는다는 기사를 보면서 부끄러워졌다.

현재 경제적 가치만을 내세우고 오만하기까지 한 MB정부가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방치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친미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기회도, 한때 민주화를 이뤄낸 줏대도 자존감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반미, 친미라는 규정이 아닌 주권을 가진 국가의 시민이 자기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습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아랍권 민중이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박 은 영 / 화가 & 애니메이션 감독

* 대화마당에 초대된 마흐무드 압둘 가파르 선생님의 친구인 박은영 선생님이 대화마당에 참석한 후 후기를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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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 독재의 공범들이 민주 개혁을 주도한다?

이집트 민주화의 이상한 흐름


"우리가 무바라크를 이겼다. 우리가 민주화를 해냈다" 지난 1월 25일부터 카이로 타흐리르(자유) 광장에 모여들어 호스니 무바라크(83)의 퇴진을 요구하던 시민들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이집트 민주화 시위가 벌어진지 18일만의 감격적인 승리였다.

1928년생인 무바라크는 1981년 대통령 직에 오른 뒤 30년을 집권했던 장기 독재자다.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이라곤 무바라크밖에 모르는 이집트 젊은 세대들은 변화를 바랬던 것은 자연스런 정치적 욕구였다.

1970~80년대 한국 닮은 이집트

중동 취재 때 이집트를 돌아보며 30년 무바라크의 철권 독재가 낳은 정치적 무기력증이 온 나라를 덮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고 1970~80년대의 한국이 떠올랐다. 1970년대의 유신독재와 1980년대의 군부독재 시절, 한국의 대학교 정문엔 형사들이 진을 치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검문하곤 했다. 언론도 자체 검열에 '알아서 기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말도 조심했다. 곳곳에 정보원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이집트가 그랬다.

카이로 국립대학의 교수를 만나려 대학정문을 들어서는데, 사복경찰이 막아서면서 "당국의 인터뷰 허가를 맡고 왔느냐?"고 물었다. 이집트 최대 야권 조직인 무슬림형제단에서 여는 집회에 참석하려 한 모스크에 갔더니, 사복형사들이 막아섰다. 그들의 험악한 얼굴에서 지난날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요구 모임들이 열렸을 때 그 앞에 진 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카이로 곳곳에 사복경찰이나 보안요원들이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고, 지식인들이나 거리의 민초들이나 모두 몸을 사리는 모습이었다. 카이로를 떠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다른 곳에 시민혁명이 일어나면 몰라도 이집트만은 어렵겠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올해 초에 드러났다. 시민혁명의 꽃이 이집트에서도 피어났다.


군부는 무바라크의 공범자였는데…

30년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독재자 무바라크는 이집트령 홍해 휴양도시인 샤름 엘셰이크로 몸을 피했고, 통치권은 이집트 군사최고회의에 넘어갔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무바라크의 충실한 부하였던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11일 저녁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날 사임하고 이집트 군이 통치권을 가지게 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군 최고위원회 대변인은 "(군부가) 민주적인 권력 이양 과정을 관장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권력을 넘기겠다"이라는 성명도 내놓았다.

그렇다면 이집트 민주화는 제대로 이뤄지는 것인가? 무라바크 퇴진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인가? 무바라크와 손을 잡았던 공범자들은 어찌 되는 것인가? 무바라크 독재의 물리적 기반이었던 군부는 민주화의 숙정 대상에서 빠지는 것인가? 지난 30년 동안 이집트에 15억 달러의 무상원조를 건네주면서 무라바크 독재 체제와 손을 잡고 중동 정치 환경을 이스라엘 안보에 유리하도록 이끌어왔던 미국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가? 의문부호는 꼬리를 문다.


나세르와 무바라크-술레이만의 차이

극소수이긴 하지만 일부 이집트 사람들은 무바라크의 권력을 잡은 군부가 양심적으로 이집트를 끌어가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들에겐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52년 가말 압둘 나세르(1918~1970)를 중심으로 한 청년장교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이집트 파루크 왕조를 뒤엎고, 그때까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외세와 그 외세에 기생하던 부패왕조 아래 정치적 무기력증에 걸려있던 이집트를 바꾸었다. 그때껏 영국과 프랑스의 관할 아래 놓여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 조치(1956년)로 접수한 것은 아랍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이집트는 미국-이스라엘과 불편한 관계 속에 지냈다. 나세르는 옛 소련으로부터 정치·군사적 지원을 받아 미국·이스라엘에 맞섰다. 그러나 나세르가 죽고 난 뒤로 이집트는 바뀌기 시작했다. 무바라크의 전임자였던 안와르 사다트는 미국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과 평화협정(1979년)을 맺어 외교관계를 텄다. 그 대가로 이집트는 해마다 15억 달러(이 가운데 군사원조는 13억)를 미국으로부터 받아 챙겼다.

많은 이슬람 민중들의 눈에 그 평화협정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던 시오니스트들과의 더러운 거래'로 비쳐졌다. 그때껏 '나세르의 이집트'를 떠올리며 대이스라엘 항쟁의 맹주로 이집트를 대접해왔던 중동국가들도 경멸의 눈빛을 던졌다. 아랍세계의 분노를 샀던 바로 그 일로 사다트는 1981년 무슬림형제단의 한 과격 분파에게 암살당했고, 그 빈자리를 무바라크가 이어받아 30년의 부귀영화를 누렸다.

공군사령관, 국방차관, 부통령을 지낸 무바라크의 대외정책은 사다트와 마찬가지로 친미-친이스라엘로 요약된다. 현지 취재를 통해서도 확인했지만, 이집트인들의 대미감정을 좋을 리 없고, 특히 대이스라엘 감정은 최악이다. 무바라크의 30년 독재에 진저리를 쳤던 이집트 사람들은 1952년 혁명처럼 이번 시민혁명으로 그동안 잊었던 아랍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다는 꿈을 지녔다. 그러나 곧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군부의 체질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나세르의 지도력을 따르던 1950~60년대의 이집트 군부와 무바라크 30년 독재체제에 기생하던 이집트 군부는 너무나 다른 체질을 지녔다. 나세르의 군부가 아랍 민족주의의 바람을 일으키고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천해나갔던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다면, 지금의 포스트-무바라크 군부는 각종 이권으로 배를 불려온 21세기의 반혁명·반개혁 세력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이집트 민중의 민주화 열기에 놀라 잠시 주춤하고 있을 뿐 무바라크와의 공범으로서 지금껏 누려왔던 기득권을 내놓을 마음이 없을 것이다.





후원자였던 미국의 속앓이

이번 이집트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미국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왔다. 겉으론 이집트 민주화를 말하면서도 친미-친이스라엘 무바라크 체제의 붕괴를 반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 민주화 요구 시위 과정에서 오바마는 "무바라크 대통령을 즉각 물러나게 할 것인지는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초당적 자유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의 사무총장 데이비드 크레이머가 "미국은 쫓겨나는 독재자들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남긴다"고 한탄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집트 민중들은 그런 미국의 이중적 태도에 분노했다. 무바라크에 대해 아랍 민중들이 분노했던 것은 미국의 중동정책의 핵심인 친이스라엘 일방주의에 무바라크가 협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무바라크 독재 체제를 떠받쳐온 기둥이자 공범이다. 미국이 중동 민주화를 말해왔지만, 그 민주화론의 창끝이 겨누는 곳은 이란과 시리아 등 반미 성향의 국가들이지 무바라크의 이집트는 아니었다.

워싱턴과 텔아비브의 지도자들의 시각에선 좋든 싫든 이집트 군부의 겉치레 민주화 개혁 조치 속에 기존의 중동정책(이스라엘 안보와 석유의 안정적인 수급)이 그대로 이어지는 구도가 바람직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무바라크 체제가 우리에겐 좋았지만, 그가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자리를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반미-반이스라엘 성향의 과격 정치조직들이 아니라) 구체제 인사들로 채워 기존 중동질서를 지켜낸다"


시민혁명은 이제부터다

이집트 민주화의 앞길엔 아직 많은 과제들이 남았다. 무바라크 독재 헌법을 폐기하고 선거법을 포함한 민주적 헌법 개정은 언제 이뤄질 것인가? 오는 9월로 예정됐던 이집트 대통령 선거는 예정대로 치르게 될 것인가? '무바라크 독재의 고무도장'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던 지금의 의회를 해산하고, 부정선거라는 의혹을 받았던 의회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인가? 이 모든 과정에서 현실적인 영향력과 돈줄을 쥔 패권국가 미국이 이집트의 군부와 어떤 주고받기 관계를 맺을지가 관심거리다.

혁명은 민중의 피가 뿌려진 토양 위에서 자란다고 한다. 2011년 2월의 이집트 시민혁명으로 적어도 300명, 많게는 900명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 앞으로 이집트 군부의 기만적인 민주화 조치가 이집트 민중들을 실망시키고, 이집트 민주화보다는 중동 석유 이권과 이스라엘 안보를 챙기는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이집트 사람들의 인식이 더욱 분명해진다면,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선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이제는 고전이 된 <혁명의 해부>(1965년)란 책에서 크레인 브린튼은 혁명이 (혁명 세력의 의도와는 달리) 단기적으로는 전보다 못한 부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고, 혁명의 긍정적 성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타날 수도 있다고 봤다. 브린튼의 이런 해석은 이집트 민주화를 위한 시민혁명의 경우에도 들어맞을 것 같다. 신해혁명(1911), 볼셰비키혁명(1917), 이란 이슬람혁명(1979) 등 20세기를 흔들었던 혁명들이 단 한 번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듯이, 이집트 시민혁명도 이제부터다.
 

김재명 프레시안 기획위원. 국제분쟁 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 칼럼(2011.02.14 )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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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라 무자파 박사 강연회



7월 20일 성공회대학교 강의실에서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저명한 무슬림 지식인 중 학명인 찬드라 무자파 박사를 모시고 '이슬람의 관점에서 본 지구화의 정치와 경제'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

그동안 성공회대 아시아엔지오정보센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와 함께 아시아권의 저명한 활동가와 지식인들로부터 지역의 인권과 평화를 향한 모색과 고민을 들어보는 국제 연속 세미나 '아시아의 인권을 찾아서'를 진행했으며, 이번 강연회는 그 다섯번째로, 아시아의 친구들, 경계를 넘어, 참여연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가 주최가 되어 열렸다.

이번 강연회는 특히 최근 악화되고 있는 중동 사태에 대해 진보적 이슬람의 시각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찬드라 무자파(Chandra Muzaffa) 박사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말레이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무슬림 지식인 중의 한 명으로, 인권을 보편적 가치로 한 문명간 대화, 강대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정의로운 세계 질서 구축, 빈곤 타파 등을 주제로 한 저서와 논문을 집필했다. 또 International Movement for a Just World(JUST)의 대표로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국제연대운동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말레이시아과학대학 교수, 말라야대학 문명간 대화연구소 소장, 국민정의당(KeADILAN) 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Globalization: the Perspectives and Experiences of the Religious Traditions of Asia Pacific”, “Alternative Politics For Asia: A Buddhist-Muslim Dialogue”, “Religion and Reform - Enhancing Human Dignity through Spiritual and Moral Transformation”, “Subverting Greed - Religious Perspectives on the Global Economy” 등이 있다.

* 강연회 내용은 첨부 화일 참조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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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미얀마 미국 대사관의

"Country Commercial Guide -- Burma: Fiscal year 2003" (78쪽)

* 책자 구입처: www.buyusa.com, www.expoet.gov 또는 www.tradeinfo.doc.gov 참조
정책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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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12월입니다. 해밑에는 늘 돌아보며 한해동안을 후회하거나 흐뭇해하게 됩니다. 남은 한달동안 한해의 마무리를 잘 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에는 대통령선거도 포함되겠죠? 그런데 대통령선거를 앞둔 지난 정기국회때 각당의 선심공약에 따라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삭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국회가 오히려 정부안보다 예산을 증액하는 사례가 속출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도 역시 시민사회의 비판의 눈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은 중앙 또는 지방정부의 예산감시운동을 하는 단체들을 미국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미국의 예산감시운동

미국에서는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예산과정에 대한 시민사회의 참여는 매우 활발하였지만, 중앙정부 차원의 참여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정부 예산 중 비국방분야에서 1955년까지 GNP의 6.7%하던 예산이 1980년이 되면서 GNP의 17.1%를 차지하면서 이에 대한 중요성이 증대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조세저항이라는 미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예산감시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의 예산감시운동 단체들은 크게 납세자의 이익을 위해 예산과정에 납세자의 의사를 반영하고자하는 단체들과, 예산 및 조세제도의 개혁에 중점을 두는 단체들, 국민의 조세부담 측면보다는 연구활동과 의회감시 등을 통하여 예산운영상의 효율성과 정부의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한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단체들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납세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으로, ▲ 조세 인상의 반대와 납세자의 조세 부담 축소, ▲ 재정적자의 축소와 균형예산의 달성, ▲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정부지출의 제거, ▲ 재정지출에 대한 정부기관의 책임성 확보, ▲ 탈세 및 조세 회피의 방지, ▲ 공정 과세와 조세체계의 단순화 등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미국의 시민단체들이 취하는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출판물, 매스컴 등을 이용한 폭로와 여론 조성 및 이슈화를 들 수 있습니다. 둘째, 직접적인 로비활동을 하기도 하며, 교육 및 연구기능을 통하여 수집된 정보와 정책대안에 대해 국민과 매스컴 등에 직간접 교육을 합니다. 또한, 의회감시를 통하여 의원들을 대상으로 납세자와 관련된 법안, 투표에 대한 평가를 수행하며, 예산심의 과정에서의 나눠 먹기식 선심성 예산배분(pork barrel)을 감시하고, 제도 개혁을 위한 청원 및 입법활동, 소송제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예산감시운동단체

예산과 정책의 우선순위 센터(the Center on Budget and Policy Priorities : CBPP)

1981년 워싱턴DC에서 설립된 예산과 정책의 우선순위센터는 20년간 조세정책과 저소득층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에 대하여 정책결정자가 직면하는 결정상황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에서는 1997년부터 "국제예산프로젝트(IBP)" 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예산정책을 분석하고 나아가 예산과정 및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비정부기구(NGOs)와 연구자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책논쟁과 관련이 있는 연구, 예산정책이 가난한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한 연구, 군비지출과 그 외의 예산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연구를 지원하는 데 특히 관심이 있습니다. 국제예산프로젝트는 주로 개발도상국이나 이제 막 민주화의 길에 나선 국가의 시민사회단체들 및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IBP와 남아프리카민주주의 연구소(IDSA)와 공동으로 수행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예산 투명성 및 참여 평가" 사업입니다. 다른 하나는 행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이스라엘 정부예산분석기관 창설 타당성 검토사업으로, 현재 이스라엘의 Adva(히브리어로 잔물결이라는 뜻)라는 단체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산낭비를 감시하기 위한 시민모임(Citizens Against Goverment Waste : CAGW)

이 모임은 민간, 비정당, 비영리 조직으로서 연방정부에서의 낭비(waste), 잘못된 행정(mismanagement), 비효율(inefficiency)에 대해 미국인을 교육시키는 데 기여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서, 1984년 기업인인 피터 그레이스(J. Peter Grace)와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Jack Anderson)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1984년 출범 당시 5천명 정도의 회원밖에 없었던 CAGW는 지금 미국 전역에 60만명의 회원을 갖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하여 1년 예산 200만달러(약 24억원)에 이르는 이 시민단체는 그레이스 위원회(Grace Commission)라고 알려진 '비용통제에 관한 대통령 민간부문 조사위원회(the President's Private Sector Survey on Cost Control)'의 후신입니다.

여기서는 "그레이스 보고서"를 통하여 26센트짜리 나사를 91달러에, 7달러짜리 망치를 436 달러에 구매한 국방부의 어처구니없는 구매낭비를 폭로해 미국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CAGW는 {정부의 낭비 감시(Government Waste Watch)}라는 계간지를 발행하여 예산낭비의 실체뿐만 아니라 예산지출 심의를 제대로 하는지를 평가한 의원 성적표도 함께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낭비가 적발될 때마다 '긴급낭비보고서'를 발표해 사회적 쟁점화를 시도하였는데, 군대의 기지폐쇄에 관한 활동이 대표적입니다. 국방예산 절감을 위해 국방부가 기지폐쇄를 발표한 이후, 폐쇄대상 기지가 있는 지역구 의원들의 기지폐쇄 반대운동을 하자 CAGW는 의원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그들의 예산낭비를 맹렬하게 공격했고, CAGW는 그 감시활동으로 수 많은 기지를 폐쇄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부정에 대항하는 납세자들(Taxpayers Against Fraud : TAF)

이 단체는 1986년에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서 주로 큐탬제도(Qui Tam)의 활용과 진척을 통해 연방정부에 대하여 부정과 싸우고 있습니다. “qui tam"은 라틴어로 “자기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왕을 위해서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내부의 공익제보자에 의해 제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종종 “whistleblower lawsuit"라고도 합니다. 큐탬제도는 1800년대 이른바 링컨법으로 알려진 False Claims Act의 재정과 함께 이에 포함된 조항으로, 개인이 정부를 상대로 사기를 행한 자를 상대로 소송을 하여 피고로부터 환수한 금액의 최고 50%까지를 보상받을 수 있는 제도입니다.

1980년대에 일년에 수백억 달러의 예산이 정부를 상대로 한 업자들의 사기행위로 인하여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되었고, 특히 예산규모가 크면서도 가격정보가 확인되지 않는 국방무기 조달절차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1995년 10월 루카스 사는 전직 루카스사의 Frederick C. Copeland가 제기한 큐탬소송에서 8,800만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하였는데, 루카스사는 미정부에 제공하기로 한 항공기 부품을 테스트 없이 납품하였고, 부품중에 결함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미 육군, 해군, 공군에 납품한 사실이 위 제보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Copeland씨는 보상금으로 1,930만달러를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General Elecronic사는 정부에 의해 승인받지 아니한 사업의 비용을 정부승인사업의 비용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하여 정부로부터 과다한 비용을 지급받았고 전직 GE사의 이사는 정부가 제공한 GE사업 기금 중 수백만 달러를 횡령한 사실을 자신의 해외항공사업부 이사로 재직중이던 내부제보자, Chester Walsh가 큐탬소송을 하여 5,950만달러를 지급하고, 제보자인 Walsh씨는 1,300만달러를 보상금으로 지급받았습니다.

정부책임 프로젝트(The Government Accountability Project : GAP)

GAP은 공익 제보자(whistleblowers)들의 보호와 시민들의 행동을 강화함으로써 정부와 공공이익을 보호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단체로서 1977년에 설립되었습니다. GAP은 공익제보자를 이끄는 전국적 조직으로서 공익제보자들의 발언을 옹호하고, 소송을 제기하며 관련 정책과 법률에 대한 법적 개혁과 정책발전을 통하여 정부의 책임을 개선시키려는 단체입니다. GAP의 주요 프로그램은 핵무기, 환경보호, 식량안전, 노동자 건강과 안전,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부와 단체 회계책임(corporate accountability) 모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GAP의 단체 회계책임캠페인(Corporate Accountability Campaign) 목적은 개혁에 대한 옹호와 부정에 대한 폭로, 공익제보자의 보호를 통하여 정부를 공공이익에 대하여 보다 책임성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단체는 핵감시 캠페인(the Nuclear Oversight Campaign)도 실시하고 있는데 이 캠페인의 목적은 핵시설 운영에 대한 민간과 군 영역에 있어 시민 시민행동들과 정부의 책임을 촉진하고, 새로운 환경위협에 대응하며, 공익제보자들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핵무기 해체와 확산방지를 진척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정부감시 프로젝트(Project On Governments Oversight : POGO)

POGO는 1981년에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서 방위, 에너지와 환경과 관련된 영역에서의 낭비, 부정과 부패들을 폭로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입니다. 특정 이익집단의 권력에 의해 연방정부가 저지른 체계적인 권력남용, 관리소홀 등에 대하여 교정을 위한 조사와 폭로 등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초기에 앞에 예를 든 436달러짜리 망치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높은 가격으로 국방비를 써버린 사례들을 밝혔습니다. 그 이후 많은 성공적인 군비지출의 개혁으로 POGO는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여 모든 연방기구들에 대하여 권력남용과 체계적인 낭비와 부정 등을 공익제보자의 진술이나 정보공개법 등을 이용하여 정부내의 자료들을 근거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POGO는 군수관련 계약과 결점있는 무기들을 조사하여, 계약 취소뿐만 아니라 펜타곤 산하에 테스트와 평가기구를 설치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연방선거위원회 데이터를 분석, 선거재정데이타의 투명성확보를 요구하였고, False Claims Act에 대한 모니터, 연방정부와 인디언토지에 대한 석유산업의 부정 등을 고발하였습니다. 최근의 POGO는 방대한 연방정부의 계약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위법여부와 부당이득을 취했는지의 여부를 조사중에 있습니다.

공공 시민 의회감시센터(Public Citizen Congress Watch)

이 단체는 Ralph Nader에 의해 1971년에 설립된 소비자 권익주창 단체로서, 소비자의 이해를 의회에 반영하기 위한 활동을 특히 상하원 의회감시를 통하여 실시하고 있습니다.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정부의 회계책임과, 법을 통해 소비자의 권리를 보상하기 위해, 그리고 깨끗하고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 자원과 무역정책에 있어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싸우는 단체입니다.

전국납세자 연합(National Taxpayers Union: NTU)

1969년 Dale Davidson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현재 50개 주에 걸쳐 30만 이상의 회원을 가진 비영리 비정당 풀뿌리 납세자 조직으로 각 주의 납세자 단체와 연계하여 활동하면서 세금인하, 세금낭비의 방지 등 납세자의 권익주창을 위한 단체입니다.

이외에도 조세정의와 빈민층의 공평한 조세를 위해 노력하는 조세정의를 위한 시민모임(Citizens for Tax Justice: CTJ), 조세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대안적 조세제도를 위한 시민모임(Citizens For An Alternative Tax System: CATS), 정부의 예산낭비를 저지하기 위한 모임인 공익을 위한 납세자 모임(Taxpayers for Common Sense: TCS) 등이 있습니다. 다음주에는 예산감시운동에 관하여 더욱 자세하게 알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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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김해지역의 수해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번 거센 태풍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은 911테러 이후 미국의 군사주의노선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가 처한 현실을 짚어 보고자 합니다.

2002년 조지 W. 부시의 연두교서

지난주 한국에 방문한 미국 국무차관 존 볼트는 8월 29일 이라크, 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거듭 지목하며, "이것은 수사학이 아니라 사실"이라면서 "북한은 주민들을 굶기면서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팔고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부시의 연두교서에 나타난 입장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부시는 올해 연두교서에서 '악의 축' 국가들을 지목하면서, 그 근거로 대량살상무기의 제조와 수출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들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고 희생시키면서 대량살상무기에 집착하고 있고, 이러한 무기들이 테러리스트에게 제공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나라들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기조 속에서 '테러리스트 척결'과 그 지원국들의 대량살상무기 생산에 대해 선제공격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하였고, 또한 이러한 '악의 축'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미사일 방어망 구축 의지를 표명해왔습니다('악의 축' 표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동맹을 지칭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진정 위협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냉전체제의 해체는 미국에게 유일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가져오게 되었지만 그 경쟁상대의 상실로 인하여 정치적 방해물의 공백을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제거하기 위해 결국 중국을 '잠재적인 위험국가'로 상정하였고, 이른바 '깡패국가'들을 지목하여 그들의 위협성을 제기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미국의 소위 '인권외교'도 가세하는데, 민주주의와 인권의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러한 국가들에 대해 자국민을 희생하면서 무기를 개발한다는 논리로 그들 국가에 대한 정치적 압박과 쿠바의 경우처럼 각종 제재조치를 정당화시키고자 합니다. 미국의 세계질서 재편의 움직임은 9.11테러로 뜻하지 않게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미 클린턴 행정부시절부터 보이기 시작한 미국의 패권강화를 위한 군사력 증강계획은 9.11테러 이후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우리는 부시 행정부의 군사주의 노선 강화에 대해 뉴스레터 4호에서 살펴본바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논리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얘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탈냉전 이후 이와 같은 미국의 위협은 많은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안보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미성향이 강했던 국가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구책이 필요하였으며, 안보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군사력 강화를 추구하는 계기였고, 가장 효과적인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이 제기되는 배경입니다. 미국이 지목한 이란과 이라크는 어떤 국가입니까? 과거 중동지역에 자신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들 국가를 지원한 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중동지역의 석유자원을 둘러싸고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민족주의를 내세운 아랍권간의 갈등은 생존을 위한(정치, 군사적인 면과 함께 무기수출로 벌어들이는 경제적 효과를 포함하여) 무장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북한의 경우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시도와 미사일 운반체계 개발은 한국전에서 B-29에 의한 원자탄 투하훈련이 확인되었고, 1992년 비핵화 선언까지 주한미군이 보유했던 전술핵, 그리고 한미합동 훈련의 시나리오에 포함되었던 핵무기 사용에 대한 대응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불신과 일방주의 : 2003년 한반도가 위험하다?

부시 행정부는 지속적으로 북한과 "조건없는 대화"에 응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작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당시 부시가 북한에 대해 "북한과는 말할 것이 없다"고 한 발언이나,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표현을 보면, 북한을 대화상대로 고려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이 북한에 대하여 강한 불신과 무시의 입장에서 비롯되는 더욱 심각한 문제는 현재 이라크 침공 이후, 다음 타켓이 북한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은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이 북한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의 일방주의적, 군사주의적 노선이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현재 북-미간 갈등을 빗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보다는 직접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2003년은 예정대로라면, 지난 1994년 전쟁직전까지 갔었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사찰이 경수로 완성 이후 재실시되는 시점이고(제네바 협상이 충실히 이행된다면), 지난 1998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에 따른 협상으로 북한이 2003년까지 미사일 발사실험을 유예하기로 합의했던 시점입니다. 더욱이 '악의 축' 발언 이후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이 제기한 북한의 생화학무기에 대한 의혹과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추가적인 사찰 요구가 있어 이러한 문제들을 북-미간, 혹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이 어떤 해법을 가지는가에 따라 매우 상이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과 제네바 협상문제

지난 1994년 제네바 협상을 통하여 북한은 핵과 관련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핵무기 의혹지역에 대한 사찰을 수용하였습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조치를 해제하고, 북한의 석유난 해소와 경수로 건립을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2003년까지 경수로를 완성하고, 경수로 관련 핵심 부품을 인도받기 전에 북한의 과거 핵활동에 대한 사찰을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부시 행정부는 경제 제재조치를 아직도 완화하지 않고 있으며, 케도(KEDO)를 통한 1차 경수로 완성도 이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제네바 합의 이전에 1-2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보유한 것으로 의심하면서, 경수로 완성 이전에 조기 사찰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에 대하여 경수로 완공의 지연에 따른 전력난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주 한국을 방문했던 존 볼트 미 국무부차관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의 즉각적인 이행에 돌입하지 않을 경우 제네바 합의의 미래는 심각한 우려에 빠질 것"이라며, 특히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는 대신에,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전력 손실 보상을 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경수로 사업이 지연된 것은 전적으로 북한의 책임이기 때문에 전력보상을 할 이유가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또한 "북한의 과거와 현재 핵활동을 효과적으로 밝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이 이뤄질 때까지, 경수로 핵심부품은 인도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중단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은 제네바 합의 사항에 대해 스스로 이행을 다하지 않고, 심지어 제네바 합의수준을 넘어서는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 미사일 관련 문제

다음으로, 1998년 대포통 1호를 발사했던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미사일발사 실험을 2003년까지 중지하고, 만약 미국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한다면 북한이 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클린턴 행정부 마지막에 거의 합의에 이르렀던 이 문제들은 부시 행정부의 출범으로 전면 백지화되었습니다. 현재 북한은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 실시하지 않고 있고, 중단거리 미사일 프로그램 포기 의사를 거듭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부시 행정부가 추구하는 미사일 방어체제(MD)에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미사일 방어체제는 상대의 미사일 위협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북한이 이를 포기할 경우 한반도를 포함한 태평양 지역에서 미사일 방어체제가 구축되어야할 설득력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부시 행정부가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의 명분을 잃지 않기 위해 북한 미사일 문제 해결에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물론 미국의 입장에서는 '잠재적 위험국가'로서 중국이 있는 한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은 추진될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에 대하여 북한은 미국이 계속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을 위해 미사일 협상에 나서지 않을 경우, 미사일 개발을 비롯한 자위적인 조치에 나설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사일 수출과 관련해서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계속 중동,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등에 미사일 수출을 해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북한의 미사일 수출은 극심한 경제난을 완화하기 위한 '외화벌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북한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를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권의 문제이며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법적으로 막을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이것은 미사일 발사실험 유예와 마찬가지로 북한은 '적절한 보상'(식량, 전력 등)만 이뤄질 경우 미사일 수출을 기꺼이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거듭 밝혀오고 있습니다.

미국이 제기하는 '악의 축' 북한이 갖는 위협은 미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으르렁대는 생쥐'일 뿐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테러나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국의 '생존'일 뿐입니다. 하지만 북한 문제에 대해 미국은 매우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즉 '아쉬운 사람이 기어라'라는 것입니다.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이 '기우'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그 위험의 징후들은 점점 더해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정부의 중재역할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올해 한국정부가 보여준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오판과 허둥지둥했던 모습들은 결코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할 때입니다. 더욱이 현시점에서 미국 일변도의 외교는 한반도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각적인 노력 속에서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를 견제할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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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길거리 응원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붉은색 티셔츠 한 장이면 누구라도 하나가 되는 그 힘,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게 한 그 힘, 그 건강함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하려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순서겠죠? 오늘은 9.11이후 미국의 군사주의와 평화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9.11테러이후 테러와 반테러

지구촌 시민사회는 지속적으로 테러반대와 전쟁반대, 국제법과 인도주의에 따른 해결을 촉구하였습니다. 올해 초 개최된 2회 세계사회포럼(WSF)에서도 공동 결의문에서 볼 수 있듯이 9.11테러를 '테러리스트들의 공격(terrorist attack)'으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형태에 대하여 명백하게 반대하지만, 이를 계기로 미국과 동맹국들의 군사행동에 대하여서도 '테러리즘적 방법(terrorist method)'으로 규정하며 전쟁의 확산과 군사주의에 대하여 명백히 반대하였습니다.

올 봄에 열린 58차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도 국제인권고등판무관 메리 로빈슨은 보고서를 통하여 테러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에 대한 대처 또한 세계인권선언과 보편적 가치, 국제인권협약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하였습니다(보다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테러의 원인'입니다. 미국은 그 동안 중동과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자국의 이해를 위하여 패권주의적 외교와 비윤리적 정치공작과 군사행동을 자행해 왔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오만함'이 그와 같은 비극을 초래한 것 아닐까요?). 그러나 미국은 이른바 '대테러 전쟁'의 국면을 이용, 군사주의 노선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움직임 : 9.11이후 미국의 강화된 군사주의

최근 미국 언론에 의하면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NSC)는 냉전시대 전략인 봉쇄와 억제를 포기하지 않은 채, 미국에게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가하는 국가에 대해 '선제공격', 혹은 '방어적 개입'을 명문화하는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을 짜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이 선제공격을 '정식으로' 채택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써, 최근 부시행정부의 움직임은 이를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부시는 지난 5월 러시아 방문시 핵무기 보유수를 현재 6-7천기 수준의 핵탄두 수를 향후 10년 동안 1천700-2천200기 선으로 대폭 줄이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러한 핵감축에 대해 부시행정부는 기존의 핵전략인 전략 폭격기, 핵잠수함,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대체할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바로 장거리 타격 능력의 강화,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 그리고 군수산업 재활성화입니다.

이 계획에 따라 지난 13일 러시아와 체결했던 탄도미사일방어조약(ABM)이 효력을 상실하자마자, 미국은 15일 알래스카에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위한 기지건설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MD구축 등에 필요한 신무기와 기술 개발에 부시 행정부는 향후 5년간 약 400억달러를 책정해 놓고 있습니다(이러한 전략 수립은 미 역사상 최고 인원인 32명이 군수산업체 경영자, 이사, 대주주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이미 예정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지하시설 파괴용 무기, 무인폭격기, 스텔스 폭격기 등 선제공격의 조건이 이미 형성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전쟁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지구촌 시민사회는 결코 용납할 수는 없었습니다. 9.11이후 미국에서의 반전 평화운동을 소개합니다.



반전과 평화의 몸짓 하나 : 미국에서의 평화운동

미국친우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 AFSC, 1917년 창설된 퀘이커교 조직. 미국, 남미, 아시아, 중동지역에 경제정의, 평화구축, 탈군사화를 위해 활동)는 'No more Victims Campaign'을 진행하여 반인도적 범죄자를 사법심판대에 세우기 위한 미행정부의 외교활동을 촉구하는 서명운동과 아프카니스탄 난민 지원활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렘지 클라크(전 미법무장관) 등 개인과 소수민족지원그룹, 경제정의그룹 등의 연대기구인 A.N.S.W.E.R(Act Now to Stop War and Racism)는 2001년 9월 29일을 '전쟁반대 국제행동의 날' 집회를 통해 반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9.11이후 한달이 채지나지 않은 미국내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날 집회에는 10,0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반대에 대한 온라인서명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세계 70만명 이상이 참여한 이 서명운동은 국제사법기관과 국제인권법에 따라 테러리스트들을 재판에 회부해야 하고, 아프카니스탄의 무고한 시민들은 테러공격에 책임이 없다는 내용을 담고있습니다(이 서명내용은 20개국 세계지도자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올 4월에는 10만여명의 시위대가 워싱턴에서 부시의 '끝없는 전쟁'을 반대하는 행진을 벌였습니다. 4개의 주요단체(the National Youth and Student Peace Coalition, the National Coalition for Peace and Justice, the 9/11 Emergency National Network, and the NYC Labor Against War)가 공동주최한 이날 행진은 군사가 아닌 사회경제적 정의에 기초한 외교정책, 인종적 정보수집과 유색인종과 청년 노동계급의 군대 충원의 중단, 9.11희생자와 경제후퇴에 따른 희생자들에 대한 정부지원, 이민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비밀투옥 중단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보복전쟁이 일단락 된 이후 미국내 평화운동은 이라크로의 전쟁확산 반대, 팔레스타인 독립, 미국내 이민자들과 이슬람권의 권익보호, 국방비지출 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반전평화의 몸짓 두울 : 이스라엘의 광기에 맞선 평화의 목소리

'대테러 전쟁'은 폭력에 대한 폭력적 대응이라는 악순환을 낳았고, 또하나의 비극을 잉태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보복전입니다. 지난 3월 폭탄테러로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곧바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 탱크를 진격시켰습니다. 테러에 대한 응징을 빌미로 자행된 만행은 예닌 난민촌에서 극에 달했습니다.

유엔 인권위가 열리고 있었던 이때, 인권위는 조사단 파견을 결의하였지만, 이스라엘의 비자발급거부로 무산되었고, 국제엠네스티의 현장조사로 비극의 일부가 밝혀졌습니다. 팔레스타인인을 '인간방패'로 삼는가 하면, 아이들, 임산부, 장애자의 시신들도 발견되었습니다(6월 현재까지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공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6월 동안의 언론에 보도된 사상자만도 10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광기에 대하여 지난 5월 12일 저녁, 이스라엘 텔아비브에는 수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평화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피스나우(PEACE NOW : 1978년 설립, 점령지역 이주자정책 감시, 인권침해 방지를 위한 활동 등을 펼치고 있음) 가 주최한 이날 집회는 10만 명 이상이이 모였고(경찰 집계 6만 명), 시위대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슬로건들을 내걸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군사력의 독점적 우위에 의한 살벌한 안보가 아니라 이성에 기초한 공존입니다. 미국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가 '불량국가'가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더욱이 북한이 이른바 '악의 축'으로 지목된 이상, 한반도의 평화도 '설마'만을 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지구촌 시민사회는 또한 예의 주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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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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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직후 미국의 평화단체 활동가가 보내온 호소문



현지시각 11일 오전 8시45분부터 연이어 일어난 가공할만한 테러로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납치된 민간 항공기 2대가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과 충돌, 완전 붕괴되는 대참사를 빚었으며, 연이어 1대가 미 국방성으로 추락,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현재 최대 8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테러사태로 인해 우리나라도 주식시장이 개장 2분만에 사상최고 주가하락율을 보이며 서킷브레이커(매매 일시중단)가 발동되는 등 경제적 여파 역시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연이어 "철저한 보복"을 외치며 "테러분자와 이들을 보호한 자들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고 나서 어떠한 형식으로든 대규모 군사적 보복이 이어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는 이미 미 정부와 언론에서 유력한 테러 배후로 지목되어 집중 수사대상에 오른 '빈 라덴'과 이를 보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테러가 발생 직후 미국 한 평화단체 활동가가 국제평화운동가들에게 보내는 메일링리스트를 통해 이 비극에 대한 호소문을 보내왔다. 왜 미국에서 이 같은 비극이 벌어지고 있으며,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진정 미국이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 활동가의 호소를 통해 들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번역 | 박여라(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우리가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 모든 다리와 터널과 지하철이 폐쇄되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맨하탄 남쪽에서 북쪽으로 천천히 걷고있는 가운데, 맨하탄이 맹렬한 공격아래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 "전쟁에 저항하는 이들의 연맹 (War Resisters League)”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붕괴로 목숨을 잃은 수백 수천명의 뉴욕사람들 입니다. 날은 청명하고 하늘은 파랗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붕괴가 일어났을 당시 그 안에 있었던 많은 구조요원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잔해 위로 광활한 구름이 큰 파도처럼 굽이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제트기가 들이받은 부분의 미국방성(팬타곤 the Pentagon)에 갇혀있던 보통 사람들에 대해 워싱턴에 있는 우리 친구들과 동료들이 가졌을 비슷한 생각도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납치된 비행기에 타고 있다가 오늘 비운을 맞이한 무고한 탑승객들을 생각합니다.

공격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지금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미 야세르 아라파트 (Yasser Arafat)는 폭탄투하를 비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자세한 정보가 생길 때까지는 더 이상 분석하기를 꺼리고 있지만 명백한 것은 있습니다. 테러리즘이 그렇게 쉽게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도구로 공격할 수 있는 한, 부시 행정부가 (외부 미사일 공격을 막겠다는) 별들의 전쟁(Star Wars)에 몇 조 달러를 쏟아 붓는 논의는 처음부터 그랬듯이 분명히 가짜 속임수였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어떤 대응이나 정책을 세우더라도 민간인을 표적으로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민간인을 표적으로 하는 어느 국가의 어떤 정책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도록 우리는 국회와 부시에게 강력히 요구합니다. 이것은 이라크를 제재하기 위해 그간 수십만 민간인의 죽음을 초래한 일도 끝내는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의한 테러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암살정책,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탄압과 웨스트 뱅크 (West Bank)와 가자 (Gaza) 지구를 계속해서 점거하고 있는 이스라엘인. 모두를 정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간 미국의 군사 정책은 인도차이나 전쟁의 역사적인 비극으로부터 시작해서 중미와 콜롬비아 “죽음의 분대”를 만들어 내고, 이라크에 경제 제재와 공중공격을 가해 수 백 만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 나라는 "전통적인 무기”의 가장 큰 제공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무기는 인도네시아에서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테러리즘에 쓰여 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저항을 도와주려는 초기 정책이 탈레반(Taliban)의 집권을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재 이번 테러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 (Osama Bin Laden)이 생겨났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 정책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과거 몇 년 동안 우리는 체첸(Chechnya) 같은 지역에서 행한 러시아 정부의 행동, 중동과 발칸반도에서의 양측의 폭력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라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국경선 안에서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청명하고 선선한 날 우리의 가장 큰 도시가 받은 맹렬한 공격에 잠을 깨어 폭력적인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안전할 수 없음을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 이 나라를 지난 몇 십 년 동안 규정 지어온 군사주의를 끝낼 방법을 찾아봅시다. 안전이 확대강화와 보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장해제, 국제협력, 사회 정의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세상을 찾읍시다. 우리는 수 천 명의 민간인을 공격한 오늘과 같은 이 공격을 주저함 없이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와 같은 깊은 비극들이 그간 미국의 정책에 의해 다른 나라의 다른 민간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떠올릴 수 있길 바랍니다. 지금 특별히 이 나라에 살고있는 중동인의 자손들이 느낄 공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공동체에 대해서 각별히 배려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한 세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수도 있고 혹은 앞으로 갈등보다는 평화로운 선택을 찾고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보다 공정하게 나누는 미래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잃어버린 목숨들을 슬퍼하면서 이제 우리의 마음은 복수가 아닌 화해를 원합니다.

이것은 전쟁에 저항하는 이들의 연맹 (War Resisters League)의 공식성명은 아니지만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작성된 초안입니다. 전쟁에 저항하는 이들의 연맹 국내 사무실에서 임직원과 실행위원회의 서명과 함께 발행되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전쟁에 저항하는 이들의 연맹 War Resisters League

데이비드 맥레이놀드 David McReynolds

As we write, Manhattan feels under siege, with all bridges, tunnels, and

subways closed, and tens of thousands of people walking slowly north from Lower Manhattan. As we sit in our offices here at War Resisters League, our most immediate thoughts are of the hundreds, if not thousands, of New Yorkers who have lost their lives in the collapse of the World Trade Center. The day is clear, the sky is blue, but vast clouds billow over the ruins where so many have died, including a great many rescue workers who were there when the final collapse occurred.

Of course we know our friends and co-workers in Washington D.C. have similar thoughts about the ordinary people who have been trapped in the parts of the Pentagon which were also struck by a jet. And we think of the innocent passengers on the hi-jacked jets who were carried to their doom on this day.

We do not know at this time from what source the attack came. We do know that Yasser Arafat has condemned the bombing. We hesitate to make an extended analysis until more information is available but some things are clear. For the Bush Administration to talk of spending hundreds of billions on Star Wars is clearly the sham it was from the beginning, when terrorism can so easily strike through more routine means.

We urge Congress and George Bush that whatever response or policy the U.S. develops it will be clear that this nation will no longer target civilians, or accept any policy by any nation which targets civilians. This would mean an end to the sanctions against Iraq, which have caused the deaths of hundreds of thousands of civilians. It would mean not only a condemnation of terrorism by Palestinians but also the policy of assassination against the Palestinian leadership by Israel, and the ruthless repression of the Palestinian population and the continuing occupation by Israel of the West Bank and Gaza.

The policies of militarism pursued by the United States have resulted in millions of deaths, from the historic tragedy of the Indochina war, through the funding of death squads in Central America and Colombia, to the sanctions and air strikes against Iraq. This nation is the largest supplier of conventional weapons" in the world - and those weapons fuel the starkest kind of terrorism from Indonesia to Africa. The early policy of support for armed resistance in Afghanistan resulted in the victory of the Taliban - and the creation of Osama Bin Laden.

Other nations have also engaged in these policies. We have, in years past, condemned the actions of the Russian government in areas such as Chechnya, the violence on both sides in the Middle East, and in the Balkans. But our nation must take responsibility for its own actions. Up until now we have felt safe within our borders. To wake on a clear cool day to find our largest city under siege reminds us that in a violent world, none are safe.

Let us seek an end of the militarism which has characterized this nation for decades. Let us seek a world in which security is gained through disarmament,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social justice - not through escalation and retaliation. We condemn without reservation attacks such as those which occurred today, which strike at thousands of civilians - may these profound tragedies remind us of the impact U.S. policies have had on other civilians in other lands. We are particularly aware of the fear which many people of Middle Eastern descent, living in this country, may feel at this time and urge special consideration for this community.

We are one world. We shall live in a state of fear and terror or we shall move toward a future in which we seek peaceful alternatives to conflict and a more just distribution of the world's resources. As we mourn the many lives lost, our hearts call out for reconciliation, not revenge.

This is not an official statement of the War Resisters League but was drafted immediately after the tragic events occurred. Signed and issued by the staff and Executive Committee of War Resisters League in the national office.

September 11, 2001.

David McReynolds
참여연대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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